나를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것들
순례길 라이프는 굉장히 심플하다.
새벽에 진동 알람이 울리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너무 더운 한낮에 땡볕에서 걷는 것이 힘들어서 다른 순례자들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침낭을 정리하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짐을 싼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상하게 나는 이 과정이 40분이 넘게 걸린다. (아무리 줄이려고 노력해봐도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방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놓고 간 것은 없는지 체크한다(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스페인으로 떠나는 인천공항에서 중요한 짐을 왕창 잃어버릴 뻔 했다. 다행히 승무원 덕분에 짐을 찾았지만, 워낙 칠칠맞기 때문에 분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습관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면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할 수 있다.
새벽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해가 뜨면 언제봐도 근사한 일출을 감상한다. 출발한지 2~3시간 걸으면 근처 마을의 바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나는 한국에서 원래 아침을 먹지 않는다. 밥 먹을 시간에 잠을 더 자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새벽 일찍 일어나 출발해 계속 걷는데, 점심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당이 많이 떨어져서 위험할 것이다. (나는 당이 떨어지면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배고픈 상태가 화가나서 그런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침을 먹을 때는 걸음을 멈출 수 있다는 타당한 핑계가 생기기 때문에 아침을 꼭 챙겨먹었다.
아침 메뉴는 신선한 생오렌지 착즙쥬스와 스페인식 오믈렛인 따끈한 또띠야를 먹는다. 아니면 카페콘레체(=카페라떼)와 뺑드쇼콜라를 함께 먹는다. 이게 어찌나 맛있는지, 얼른 아침 먹고 싶다는 생각에 씩씩하게 파워워킹을 하게 만든다. 오전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행복한 순간이다. 사실 걸을 때 오늘 아침(혹은 점심 혹은 저녁) 뭐먹지 하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먹을 생각을 하면 힘이 나서 걸을 의지가 생긴다. 순례길에서 먹는다는 것은 행복의 만능 치트키다.
그러고 또 한참을 걷는다. 한참이라는 것은 목적지인 다음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뜻한다. 걷다가 중간중간에 적당한 장소(벤치, 넓은 돌, 푸드 트럭, 그늘 등)가 나오면 쉬어준다. 쉴 때는 모자도 벗고 등산화도 벗어서발을 바람에 말리며 해방감을 누린다. 날마다 걷는 거리와 걸리는 시간이 다른데, 평균 27km를 7~8시간에 걸쳐서 간다. (처음엔 천천히 조금씩 걷다가 체력이 붙으면 빠르게 많이 걸을 수 있다) 걸을 때 만나는 무화과 향기, 길냥이, 들꽃,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중간에 목이 마르면 꼭 환타오렌지(맛이 나는 KAS라는 음료수. 그냥 편하게 환타오렌지라고 불렀다. 맛이 완벽히 똑같다)를 사서 마셨는데, 그 목넘김이 얼마나 청량한지 온몸의 세포가 좋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목적지 마을에 도착하면 미리 봐두었던 숙소에 체크인을 한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이 늘어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쁜 모양이나 특별한 색깔의 도장이 찍히면 그게 또 그렇게 기분이 좋다.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러 가는데, 먼지에 휩싸여 땀에 찌든 몸을 씻어내릴 때 생각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샤워 속에 있을 거야!’ 하루 중 가장 기쁠 때가 샤워할 때다. 샤워한 다음 개운해진 몸으로 빨래를 하러 간다. 초반 3~4일은 손빨래를 했는데 빨래 물기를 짤 힘이 없어서 계속 돈을 내고 세탁기를 이용했다. 세탁기를 발명한 사람에게 노벨평화상을 줘야한다고 생각하며 빨래를 넌다. 빨래가 마를 동안 숙소에서 낮잠을 잔다. 스페인에는 씨에스타라는 낮잠 문화가 있는데, 스페인이야말로 문화선진국이라고 감탄하며 환타오렌지 마시는 속도로 잠든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뜨거운 햇빛 때문에 빨래가 바삭하게 말라있다. (바삭하다 못해 타들어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빨래를 정리하고 마을을 구경하러 다닌다. 나는 큰 도시가 아닌 작은 마을에 주로 머물렀기에, 아무리 느릿느릿 구경해도 마실이 금방 끝난다. 그러면 순례자 메뉴를 파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이때 반드시 와인을 함께 먹는다. 스페인은 와인이 무지 싸고 맛있다. 와인 한병에 슈퍼마켓 기준 2유로 밖에 안한다. 이렇게 와인을 물 마시듯이 마실 수 있다는 것에 흐뭇함을 느끼며 알딸딸해질 때까지 양껏 천천히 먹고 마신다. 그렇게 해도 숙소에 돌아오면 해가 아직 떠있고 환하다. 낮이 엄청 긴 스페인은 오후 9시에도 환하다. 낮술하는 기분으로 거나하게 와인을 즐긴다.
자기 전에는 챙겨간 펜과 공책에 그림일기를 쓴다. 기분좋게 취한 상태로 쓰는 일기이므로, 그닥 고민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갈겨쓰는데, 주로 ‘스페인에 오다니, 나는 멋져! 용감해! 여기 오길 잘했어! 크으~ 오늘도 열심히 걸은 나, 너무 근사해!’ 같은 자기뽕에 취한 초딩같은 내용이다. 일기를 다 쓰면 다음날을 위한 준비를 세팅해놓고 침낭으로 쏙 들어가 뒹굴거리다가 몽롱해지면 핸드폰을 충전시키고 환타오렌지 마시는 속도로 잠든다.
이게 순례길이다. 순례길에서는 그저 걷고 먹고 자고 밖에 없다. 이 단순한 패턴 속에서 아주 높은 빈도로 행복감을 느낀다. 아침밥, 걷다가 만나는 들꽃, 샤워, 세탁기, 낮잠, 와인.... 정말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별 것으로 어마어마한 만족감을 주었던 순간들이었다. 이 순간들을 알아챌 수 있는 감수성이 내게 있음에 감사했고, 이런 마음의 여유를 준 이 길에 감사했다. 순례길에서는 매순간이 행복할 것과 감사할 것 투성이였다. 감사하면 행복했고 행복하면 감사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 최고의 완벽한 선순환이리라.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한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생각해보면 꼭 순례길이 아니어도 그런 순간들은 주변에 널려있다.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발견했을 때, 빵 굽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날 때, 파랗고 예쁜 하늘일 때, 어린 아이의 티 없는 웃음소리 들을 때, 단골 카페의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비었을 때, 공원 산책하는데 커플이나 부부가 다정하게 나란히 걷는 것을 볼 때, 보들보들한 수면양말 신을 때.... 내가 행복을 느낄 마음의 준비만 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현재 내 삶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만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행복은 태도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순례길을 걸으면서 행복한 적이 정말 많았다. 그 순간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나가고 나서야 행복했음을 깨닫기도 하고, 그 순간 행복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기도 했다. 전자의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쉽다. 행복을 그 순간에 깨닫는다면 그건 얼마나 내 삶에 생생하고 강렬하게 새겨질까. 행복에 대한 촉수가 예민한 사람이 되고 싶다. 후자의 경우를 보다 자주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크으~ 역시 순례길에 다녀오길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