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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계

내 한계는 내가 정해!

반짝!


별똥별을 보았다. 여느 날보다 더 일찍 출발했다. 해가 뜨기 한참 전에 출발해서 주변은 온통 까맣고 순례자는 나밖에 없었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놓고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을 걷는데, 별똥별이 선을 그으며 순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징조가 좋다. 날씨마저 덥지 않고 시원하게 잘 따라주는 날이다. 발 컨디션도 역대급으로 좋았다. 열 한번째날, 최상의 상태로 경쾌하게 걷고 있었다. 느낌이 아주 좋다. 뭔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전날부터 계속 고민을 했다. 다음 목적지를 어디로 정할지에 대해서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했다. 부르고스까지 남은 거리는 46km 였는데 이상하게 자꾸 부르고스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루동안 가장 길게 걸어본 거리는 30km 였고, 그게 최대치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브루고스를 이틀에 걸쳐서 가려고 하면 오늘은 23km  정도 걷다가 아따뿌에르까에서 묵고 내일 브루고스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23km 걷는 것은 또 너무 아쉬웠다. 배낭을 옮겨주는 동키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브루고스까지 하루만에 갈 수 있을까? 그래도 무리다.... 내가 46km를 도저히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아서, 스스로를 못 믿어서, 결국 포기하고 동키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따뿌에르까를 목표로 걷는데, 다른 날과 달리 날씨가 너무 좋았다. 구름이 적당히 껴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햇빛이 세지 않아 기온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서늘해서 걷기 딱 좋은 날씨가 주어졌다. 게다가 몸 상태가 최상이었다.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걷는 속도도 저절로 빨라졌다. 걷는 코스도 숲길이라서 듬뿍 산소를 들이키며 상쾌함을 누렸다. 온 몸의 세포가 충만했다. 역시 뭔가 다르다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소설 <데미안> 중에서


기분 좋게 아침을 먹으러 들어간 바에서 한국인 청년 두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아침을 다 먹고 다시 길을 출발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하고 그들을 보낸 뒤, 느긋하게 카페 콘 레체와 크루아상으로 배를 따뜻하게 채웠다. 다시 경쾌하게 걷다가 얼마 안가서 청년들을 따라잡았다. 벌써 왔냐며 놀라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뿌듯해했다. 아까보다 긴 인사를 나누다가 어디까지 가냐는 말에, 나도 모르게 부르고스까지 가볼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냐며 놀라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더욱 뿌듯해했다. 진짜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가하지 않았기에 동키도 보내지 않았는데, 아따뿌에르까에서 멈출 것이라고 이미 정했는데... 불쑥 튀어난 그 말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이었다.


걸음이 빠른 내가 그들을 제치고 씩씩하게 걸으며 아따뿌에르까에 도착했을 때는 12시 쯤이었다. 11일을 걸었지만 가장 이른 도착시간에 조금은 당황했다. 계획대로라면 당연히 그 마을의 알베르게에 체크인 해야하는데, 이상하게 아쉬웠다. 이 좋은 날씨와 몸 상태로, 이렇게 일찍 마무리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알베르게에서 그 청년들을 만나면 약간 민망할 것 같았다. 시원스럽게 부르고스까지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마주치면 부끄럽고 말만 번지르르한 허풍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부르고스까지 가기엔 아직 23km가 남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부르고스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멈추기엔 아쉽고, 더 걷기엔 두렵고, 두 가지 감정에서 갈피를 못잡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와중에 아따뿌에르까의 슈퍼 앞에서 혼자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귀인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는 호주에서 온 할아버지였다. 마을 도착하기 전 숲길에서부터 할아버지를 알고 있었다. 카우보이 모자가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원래 걸음이 빠른 내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걷는데도 불구하고, 따라잡지 못하고 계속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이도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너무 빨리 잘 걸어서, 그 사실이 인상 깊어서 할아버지를 의식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나보다 앞서 마을에 도착해서 점심을 드시고 슈퍼 앞에 앉아 있는 내게 말을 거셨다. 할아버지는 마당에 캥거루 있냐는 내 농담에 한술 더떠 코알라도 마당에 놀고 있다며 유쾌하게 받아치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할아버지에게 어느 알베르게에 체크인 했냐고 물어보았는데, “난 부르고스까지 갈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여기서 멈추실 줄 알았는데 화들짝 놀란 나는, 여기서 23km를 더 걷는다구요? 그게 가능해요? 같은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현명한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와 같이 말하면서 내 마음의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한번에 브루고스까지 가려고 하지 않아. One step 걷다가 힘들면 쉬고 그러다 또 One step 걷고 그러다 또 쉴거야. 그러다보면 Next step에는 브루고스에 도착해있지 않겠어? Step by Step”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도 여기서 23km를 더 걸어서 브루고스에 간다는 사실에 뒷통수가 얼얼했다. 애초에 왜 브루고스까지 가지 못한다고 내 한계를 정했을까. 내 한계는 내가 정한다. 나는 브루고스까지 갈 수 있다. 내가 그렇게 정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떠나자마자 바로 브루고스의 호텔을 예약한다. 숙박할 곳이 정해졌으니 알베르게에 침대가 남아있을까 걱정하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하면 됐다. 애초에 내가 나를 믿었다면, 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배낭을 동키로 보냈을텐데.... 내 그릇이 그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쿨하게 비웃어주며, 그 어느때보다 확신에 찬 발걸음을 옮겼다. 부르고스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 소설 <데미안> 중에서



나는 이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부르고스에 갈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느낌으로 산을 오를 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혜로운 노인은 내게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면 마침내 할 수 있다는, 너무 욕심내지 말고 조금씩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30km 이상의 거리를 걷는 것은 내게 무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보란듯이 그 생각을 깨고 해냈다. 아따뿌에르까에서 머물다가 다음날 새벽에 출발했으면 어둠 때문에 보지 못했을 멋진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를 둘러 싸고 있었던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느낌이었다.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호주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내게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순례길에서 누구나 영적인 순간을 한번쯤은 맞이하게 된다고 했다. 내게는 이 날이었다. 할아버지와 간발의 차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걸었지만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길은 하나였고 목적지는 같았다. 할아버지는 방아쇠를 당기고 사라졌다. 나는 이 날, 토산토스에서 출발해 아따뿌에르까를 지나 브루고스에 도착한다. 총 46km를 걸었고 12시간이 걸렸다. 순례길 통틀어 가장 내가 내 마음에 든 날이었다. 나는 내 한계를 깼다. 애초에 한계가 아니었다. 가장 오래 많이 걸었던 이 날이, 가장 감동적이고 짜릿했던 날로 기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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