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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배려

가능한 친절하자

메세타 평원


부르고스에서 시작되는 메세타 대평원은 레온까지 일주일을 넘게 걸어야 지나갈 수 있는, 말 그래도 대평원이다.  메세타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무시무시하다. 많은 순례자들이 가장 힘들다고 하는 구간도 메세타다. (그만큼 더 값진 경험이므로 순례길의 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차라리 피레네 산맥을 오르는 게 덜 힘들다고 고개를 젓는다. 따라서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메세타를 대중교통으로 건너 뛰기도 한다. 시간이 있어서 메세타에 도전했다가 중간에 힘들어서 점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메세타 평원은 악명이 드높다. 실제로 메세타 구간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순례자의 수가 확실히 적은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일단 고도가 꽤 높은 평원이라 바람이 아주 세차게 끊임 없이 분다. 한여름에 메세타를 지난 나도 바람이 어찌나 강한지 꽤나 쌀쌀함을 느낄 정도였다. 아침저녁으로는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그리고 끝도 없는 밀밭은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세시간을 걸어도 풍경에 변화가 없다. 그저 밀밭만 보인다. 태어나서 처음보든 지평선이라며 감탄하고 사진찍고 하는 것도 한시간이 가질 않는다. 그저 얼른 끝나기만을 바라며 지긋지긋한 밀밭을 저주하게 된다. 또 메세타에는 쉴 곳이 잘 없다. 마을 사이 간격이 어마어마하다. 평원에는 나무도 잘 없어 그저 땡볕에 몇시간이고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다.


브루고스에서 온타나스로 가는 순례길 13번째 날, 나는 프란츠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아저씨는 독일에서 순례길을 걷기 위해 오셨는데, 3일 전에 순례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아저씨는 그 날이 순례길을 시작하는 첫날이었고, 수줍음이 많아서 사람들과 말을 잘 못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모든 순례자들은 아저씨의 친구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고 응원해주었다. 그날 아침동안 함께 걸었는데, 걷다가 어떤 식물을 따서는 손으로 비벼서 나에게 냄새를 맡게 해주셨다. 그때 싱그러움과 풋풋함이 가득한 향기를 맡고 기분이 산뜻해졌었다. 그날 만났던 아저씨와 다시 마주쳐 함께 메세타를 걷게 되었다.



메세타를 걷기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 메세타가 왜 메세타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똑같은 풍경이 반복되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지루하고, 광활하면서도 단조로운 그 풍경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후부터는 다들 썩은 표정으로 말도 없이 걸었다. 프란츠 아저씨도 뒷목이 타서 따갑다며 힘들어하셨다. 계속해서 남은 km가 적혀져 있는 표지판을 의심했다. ‘일부러 줄여서 적은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걸었는데도 아직 마을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5km는 줄여서 순례자들을 속이고 있는 게 틀림없어.’ 마을이 보이지 않아 희망조차 생기지 않았다. 주저 앉아 엉엉 울기 직전에 숨어있던 온타나스가 나타났다.


내가 온타나스에 도착하기 직전에 엉엉 울고 싶었던 것은, 발이 아프고 목이 마르고 체력적으로 지치는 것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에 나는 생리를 하는 둘째날이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생리대가 떨어진 것이었다! 예정일보다 더 일찍 생리를 시작해서 미처 충분한 생리대를 준비하지 못한 채로 메세타 구간에 들어섰고, 마을이 극히 적은 그곳에서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슈퍼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내가 계속 초조해하자 프란츠 아저씨가 걱정말라며, 자기가 해결해주겠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온타나스에 도착하자마자 아저씨는 나보고 체크인 먼저 하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몇 분 뒤에 나에게 와서 생리대 한무더기를 건네 주면서, 알베르게가 작은 슈퍼도 겸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너의 비밀은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젠틀하게 말하셨다. 그냥 수더분한 아저씨인줄 알았는데 이리도 섬세하고 친절하다니! 이 멀고 낯선 땅에서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며칠 전까진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에게 이런 배려를 받다니! 아저씨의 도움 덕분에 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사실, 별말 없이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신경써주시다니.... 너무 감사해서, 그 마음을 표현해주고 싶어서, 아저씨의 뒷목을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한 내 쿨스카프를 선물로 드렸다.


순례길에서는 이런 친절함이 자주 보인다. 물집이 나서 고생하는 중이라고 말하면, 너도나도 소독용품과 물집패드를 나눠준다. 걷다가 너무 힘들어하는 순례자가 보이면 물과 간식을 건네준다. 사용하던 수건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자기가 갖고 있는 여분 수건을 기꺼이 기증한다. 나중에 본인도 수건을 잃어버리면 여분이 없어서 곤란할텐데 그런 계산은 절대 하지 않는다. 깜깜한 새벽에 길을 걷다가, 헷갈리는 길을 만나면 뒷사람을 위해 랜턴으로 신호를 주고 다시 갈길을 간다. 친절함과 배려와 베풂을 매일매일 느낄 수 있는 곳이라서 이 길이 너무 좋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베풀 때 받는 쪽만 축복 받는 게 아니라, 주는 쪽 역시 축복을 받아요” - 소설 <오베라는 남자>


오베는 규칙과 질서를 중시했다. 그는 다소 답답하고 엄격하고 융통성이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오베는 올바르게 산다는 자부심과 함께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했다. 그리고 겉으로만 까칠하지 속은 무지 다정했다. 툴툴대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항상 손을 내밀어 주었다. 도움을 주면서 오베는 삶을 계속할 이유를 찾았다. 오베가 이웃의 울타리를 고쳐주었더니 이웃은 따끈한 홈메이드 사과파이를 주었다. 오베도 이웃도 공동체의 정을 느꼈다. 사람이 사람에게 친절함을 베푼다는 것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게 해준다.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이 어디 있을까.


오베는 실천하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들을 구별했다. 오베는 점점 더 말을 줄이고 점점 더 실천을 했다. - 소설, <오베라는 남자>


이 경험을 계기로 가능한 친절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내게 아무 고민 없이 베풀어준 사람들처럼 나도 기꺼이 사람들을 돕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떤 사람이 되자고 결심한 적은 정말 수도 없이 많았다. 과장 살짝 보태서 메세타 평원에서 보는 밀알보다 조금 덜하게 결심한 것 같다. 나는 부모님에게는 사려깊은 효녀가 되자고, 직장 동료에게는 꼼꼼한 커리어우먼이 되자고, 연인에게는 러블리한 사랑꾼이 되자고, 스스로에게는 내면도 외면도 자기관리 철저한 매력적인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만 그럴듯하게 하고 실천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결심이 반복해서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탐구해보니 내가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결심한 바를 자꾸 까먹었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함을 기억하자. 이제는 이 악순환을 끊어낼 때가 왔다. 오베처럼 말을 줄이고 실천을 하자. 실천함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은 당근을 좋아하고 1kg짜리 똥을 싸는 동물일 뿐이다. 말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기억하자. 말보다 행동. 친절한 사람이 되자.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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