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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친구

편하게 장난치며 다가가기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진다”


언젠가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았다. 함께 술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하지만 친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겉으로는 그 사람들과 섞여들어갔지만 속으로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 사람들이 다시 육지로 가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는데 나는 그게 부담으로 느껴졌다. 다들 들떠서 만나자 그러자 약속을 잡는데 나는 그냥 머뭇거리다가 웃기만 했다. 친해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타입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스스로 벽을 치고 있었다. 그걸 느낀 누군가가 나에게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얘기해주었다.


인간관계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몇가지 고민을 안고 산다. 내 경우에는, 처음 만난 사람과 친해지는 게 어렵다는 것이었다.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그 이상의 친근한 관계가 되는 게 이상하게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정말 편하고 친한 친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딱히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아서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탐구하고 해결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순례길을 걷다가 답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그날은 레온에서 오르비고로 가는 날이었고, 꽤나 오랫동안 외면해두었던 내 고민의 해답를 얻을 거라고 생각치도 못했던 날이었다.


4일치 걸을 거리를 점프하고 레온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라, 보름 넘게 마주쳤던 순례자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새로운 사람들이었고, 익숙한 얼굴이 아무도 없었다. 딸처럼 나를 대해주던 프란츠 아저씨, 위풍당당하게 걷던 이탈리아 무리(씩씩이들), 한국인에 대해 편견을 가진 파르티, 버스킹을 하며 순례길을 걷던 기타맨.... 그들은 모두 나보다 한참 뒤에 있었다. 만나서 오늘은 컨디션 괜찮냐고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시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울컥함을 느끼는 날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길을 가야지 생각하며 오르비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등산화를 벗고 발을 말려주기 위해 길거리의 바에 들어가 오렌지쥬스를 시키려고 하는데, 아는 얼굴이 보였다. 브루고스에서 잠깐 함께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다른 일행과 함께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안그래도 모르는 사람밖에 없어서 새삼 순례길이 낯설었는데 격하게 반가워서 성격답지 않게 냉큼 합석을 했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보니까 오르비고 전의 아주 작은 마을에 머물거라고 하더라.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는데, 정말 답지 않게 그것밖에 안가냐며 역시 나이는 못속인다며 신나게 놀리고는 오르비고까지 같이 가자고 꼬셨다. 이미 조금만 걷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능글맞게 오르비고에서 기다릴테니 얼른 따라오라며 도발했다.


그렇게 나는 순례길을 걸은지 17번째 날에,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산티아고까지 쭈욱 함께 걷게 될 사람들과 만났다. 많게는 나보다 9살 많은 오빠도 있었는데, 원래라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예의 차리면서 조심스럽게 있었을텐데, 이상하게 정말 허물없이 장난치며 놀았다. 29살 오빠에게 아홉수라며, 액운이 옮을까 무섭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놀리기도 하고, 키가 작은 언니가 보폭이 좁아 남들보다 만보 더 걸어서 만보기 언니라고 놀리기도 했다. 무례하게 말한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장난으로 말하니까 다들 서로를 까면서(?) 웃게 되었다. 나는 그 무리 속에서 정말 재밌어했고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르비고에 도착해서 내가 정한 숙소에 다같이 머물렀는데 냉수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전부 뜨거운물로 샤워를 헀는데 나를 웃으며 원망했다. 나는 능글맞게 이열치열 아니겠냐며 샤워하고 난 다음 시원함을 느끼라는 나의 큰 그림이라고 우겼다. 숙소의 침대는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침구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베드버그가 걱정이 되었다. 나는 다시 능글맞게 이런 전통적인(?) 알베르게를 체험해보는 것도 다 경험이라고 우겼다. 만약 내가 지나치게 미안함을 표현하면 오히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을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는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뻔뻔함이 때론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어준다.



이후에도 함께 걸으면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만들어 먹고, 가위바위보로 설거지를 정하고, 땅콩안주에 와인을 나눠마시고, 온갖 얘기를 했다. 손이 커서 항상 많이 시키는 S오빠, 원래는 날다람쥐지만 발목부상으로 최약체 취급을 받았던 B오빠, 그들의 총애를 받아 삼각관계를 이루던 자취요리꾼 C오빠, 관심분야 나오면 투머치토커가 되는 N오빠, 전봇대보고 혀클리너를 떠올리는 창의적인 Y언니, 명대사 중독증에 막내를 맡은 나까지 6인의 동행체제가 형성되었다.


동행들과 함께 있을 때 어떠한 이질감이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나한테는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토록 편하게 스며들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니. 여행을 가서 만난 사람들과 일상에 돌아간 다음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데, 이번엔 달랐다. 나는 내 동행들이 너무 편했고,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해서 꼭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 시작은 장난치며 편하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너무 격식차리지 않고, 밉지 않게 능글맞게 농담 던지며 다가가는 것이 바로 열쇠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상대방의 기분을 걱정해서 까내리는 농담을 거의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사람이 친해질 때에는 서로의 인간적인 부분을 놀리며 웃는 것이 굉장히 효과적인 것을 깨달았다. 까면서 친근감을 느낀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생각보다 장난과 유머가 가까운 관계를 만드는 것에 엄청난 촉매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굉장한 비밀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여태껏 내가 묘한 거리감을 느꼈던 것이 예의를 차린다고 장난을 치지 않았던 것이라니! 원인을 찾았으니 해결방법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장난을 많이 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기분 나쁘지 않게 선을 잘 지켜야겠지만.


사람의 허술함과 인간미는 다가가고 싶은 친근한 이미지를 만든다. 나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강해서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을 만들기 싫어했는데, 그게 참 어리석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상대방은 나의 허술함을 보고 비웃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밌는 사람이라며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동행들도 나를 놀리고, 나도 동행들을 놀리면서 서로 친밀감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유머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내 고민에 대한 해답이다.


내가 순례길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생활 속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기술이 바로 사람에게 편하게 다가가는 법이다. 장난치며 웃음 만들기. 친한 친구가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런 사회적 기술을 이미 체득해서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들이 많다. 이 쉬운 것을 여태껏 왜 몰랐을까 싶기도 하고, 이제는 알았으니 잘 써먹어서 가까운 편한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지 생각도 든다. 나름의 인간관계에 대한 방향을 잡은 역사적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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