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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면돌파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

지끈


새벽에 눈을 떴는데 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잠들기 전에 매번 물집을 소독한 바늘로 터트리고 물집밴드를 붙이고 자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상황은 나빠졌다. 비야프랑카에서 오세브레이로에 가기로한 날, 등산화를 신은 것도 아닌데 발바닥이 지끈거렸다. 오세브레이로에 가면 자전거를 렌트해서 40km를 활주할 수 있다고 전날에 이미 동행들을 한번 더 꼬셨는데, 막상 나는 오세브레이로까지 갈 수나 있을까 의심이 들었다. 너무 아파서 그냥 하루 비야프랑카에서 휴식을 취할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자전거 타자고 꼬셨던 당사자는 없이 자전거를 타게 될 동행들에게 너무 미안해질 것 같았다.


결국 오기가 생겨서 등산화를 신었다. 여기서 쉬었다 가는 게 아니라 동행들과 함께 오세브레이로에 가서 자전거를 타겠다고 하고 어기적 어기적 걸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주변이 너무 어둡기도 하고 위험해서 동행들과 같이 걷다가, 해가 뜨고 주변이 밝아지자 나는 발 상태 때문에 천천히 걷겠으니 먼저 가라고, 오세브레이로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동행들을 먼저 보내고 걷는데, 물집 때문에 고통스러우면서도 화가 났다. 물집 따위에 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강해, 나는 물집보다 강해’ 속으로 되뇌이며 일부러 더 물집을 짓눌렀다. 짓누르고 짓누르다보니 고통에 적응이 되어 오히려 걸을 만했다.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내가 물집을 이겼다. 나는 보통 독한게 아니다.


오세브레이로는 산꼭대기에 있는 마을이라, 가는 길은 내내 오르막이었다. 나는 내리막보다 오르막을 훨씬 좋아했는데,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는 게 좋았다. ‘심장이 폐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뛰는구나’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숲 속에서 상쾌하고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노폐물을 배출하는 그 느낌, 얼굴은 벌개지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내가 열심히 이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 내 다리의 근육들이 수축이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 느낌이 나는 정말이지 좋았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등산을 자주 즐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엄마는 등산이 좋아졌다는 나에게 그걸 알다니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하고,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통역노예 N오빠 덕분에 다음날 자전거 렌트 예약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미리 정해둔 사리아의 숙소에 짐을 옮겨주는 동키 서비스를 신청한 뒤 자전거를 받았다. 사리아까지 43km를 자전거를 타고 쭈욱 내리막을 신나게 달리면 되는데, 막상 출발하려니 문제가 생겼다. 나는 태어나서 자전거를 딱 4번 타봤다. 것도 공원에서 대여해주는 자전거로 평지만을 타보았는데, 막상 자전거를 타니 엉덩이가 너무 아팠고, 패달 밟는 것이 어색했다. 기어를 조절하는 법도 잘 모르겠고, 방향전환도 어색해서 영 불안했다. 자전거라곤 4번밖에 안타본 내가 막상 자전거로 순례길을 내려오려니 너무 위험해보였다.


겉으로는 짖궂게 장난쳐도 속으로는 친절한 동행들은 내 속도에 맞춰서 함께 가주었다.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면서, 오르막을 힘들어하는 내게 힘차게 응원해주었다. 나빼고 전부 다 자전거를 너무 잘타길래 민망할 정도였다. 자전거도 잘 못타는데 자전거 타자고 꼬셨냐며 나를 놀리는 오빠들의 격려(?)에 자극 받아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패달을 밟았다. 거의 다 내리막이라는 내 얘기를 듣고 자전거 타기로 했는데 막상 오르막이 꽤 있어서 다시 한번 윤지한테 사기 당했다고, 신뢰도가 하락했다고 장난치는 오빠들은 내리막이 나타나자 정말 씽씽 달렸다. 기어를 조작할 줄 몰라 쩔쩔맸던 나도 내리막에서는 속도를 높이며 슝 내려왔다.



내가 언제 스페인 순례길에서 자전거를 타보겠어!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이날의 라이딩은 정말 시원하고 짜릿했다. 늘 두발로 걷기만 했는데 엄청난 속도감과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무섭고 힘들어서 43km를 자전거 끌고 울면서 걸어 내려왔을 것이다. 애초에 자전거를 빌리는 것부터 고민하다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든든한 언니오빠들이 있었기에 계획했던 자전거 라이딩을 실행할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기에 나란히 소리치며 달렸던 더 특별하고 재밌었던 경험이었다. 그 순간엔 엔돌핀과 도파민이 샘솟아 이보다 더 신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났었다. 자전거 타길 정말 잘했어. 함께 타길 정말 잘했어.


물집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을 때에도, 자전거는 타고 싶은데 미숙해서 걱정이 될 때에도, 나는 무식하게 문제를 들입다 박았다. 정면돌파. 진검승부. 적당히 타협하거나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했다. 그랬더니 문제는 무식하고 씩씩한 나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모든 상황이 이렇게 쉽게 잘 풀리진 않겠지만, 평소에 워낙 생각이 많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나에게 있어서는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물집이 더 덧나서 걸을 수 없거나, 넘어져서 크게 부상을 당하는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최악의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내가 혹시 모른다며 비야프랑카에서 연박을 했다면 동행들과 헤어졌을테고, 함께 자전거를 타는 경험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자전거 타는게 무섭다며 걸어서 내려갔다면 그 멋진 순간을 겪지 못했을 것이다. 정면돌파를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쉽게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다. 가만히 고민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렇게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후회를 반드시 남긴다. 내게 기억에 남을 멋진 경험을 제공한 것은 용기를 내서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 태도였다. 회피가 답이 아니라면, 문제와 진검승부를 하자. 니가 니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면 결국 내가 이긴다.



사리아에 도착해서 언제나처럼 빠르게 씻고 밥을 먹으러 갔다. 갈리시아 지방의 명물 뽈뽀(문어) 요리를 먹기 위해서 였다. 나는 근데 원래 문어를 싫어해서 안먹는다. 냄새가 나에겐 이상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숙회건 초밥이건 탕이건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순례길에서 꼭 먹어봐야한다며 뽈뽀를 기대하는 동행들에게 내 속내를 차마 드러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처럼 근사하게 라이딩을 한 날에는 더더욱. 맛집검색담당 S오빠가 자신있게 추천한 곳에 떨떠름해하며 쫄래쫄래 따라갔다. 다시 한번 나는 정면돌파로 크게 한입 뽈뽀를 먹었고,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배한가득 문어를 먹었다. 나는 이제 문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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