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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행

혼자 또는 함께

이대로 괜찮은 걸까?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6인의 동행체제가 완성되고 함께 걷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웃고 떠들면서 걷고,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고, 와인을 나눠마시며 잠들기 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 정말 재밌었지만 한편으로는 혼자서 사색하면서 걷는 시간이 없으니 초조함이 조금씩 생겼다. 대학생 때 MT온 기분으로 즐길 수 있었지만,  그럴려고 순례길을 온 게 아니었는데.... ‘이대로 계속 함께 다니는 게 과연 맞는 걸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나타났다.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하며 걸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슬슬 이 무리를 떠날 때가 된 것일까?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 이유는 3가지다. 첫째, 내가 혼자가 되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면 너무 외롭고 쓸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걸은 사람들과 서로를 축하해주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둘째,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서 멀어지기 싫었다. Y언니는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사람들 만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그래서 지금 동행들을 만난 게 기적같다고.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헤어지고 또다른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걸을 때에만 따로 걸으면 된다. 내 페이스대로 따로 걷겠다고 숙소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면 된다. 혼자만의 시간과 함께하는 시간의 타협점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날, 팔라스 델 레이에서 출발할 때, 시간차를 두고 따로 걷겠노라 생각했다. 하지만 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그날의 목적지 마을까지 38km를 걸어야해서 평소보다 일찍 출발했는데, 날씨가 매우 궂어서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구름이 달빛마저 가려 앞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숲길이라 나무 사이로 바람이 웅웅 지나가면서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안개가 심해서 가시거리가 10m도 되지 않았다. 원래 겁이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뒤에서 귀신이 나타날 것 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걸음이 빨라서 한참 앞에 따로 가고있던 C오빠와 S오빠가 무섭다며 서로를 찾아해맸다.


깜깜한 숲속을 서로 의지하며 헤쳐나갈때는, 동행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존재에 감사해하며 혼자가 아님을 진심으로 다행스럽게 여겼다. 생각해보면 함께일 때 장점이 훨씬 많았다. 어느순간 정신을 차리니 자연스럽게 역할이 분담되어, 맡은 바 책임을 지고 서로를 위해 봉사했다. 스페인어가 매우 능통한 N오빠는 현지인 통역을, C오빠는 요리와 길찾기를, S오빠는 특유의 센스로 재밌는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B오빠는 리더로서 멤버 챙기기를, Y언니는 빨래 등의 일을 솔선수범으로 나서주었다. 나는 막내라는 이유로 딱히 한 일이 없었다. 늘 뭔가를 하자고 꼬셨을 뿐이다. (정말 언니오빠들에게 감사하다)


해가 어느정도 뜨자 나는 따로 떨어져나와 혼자 걸었다. 오랜만에 나만의 페이스대로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동행들과 함께하면서 발견한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 특히 많이 생각이 났다. 나는 생각보다 더 이기적이고 미성숙하구나.... 내가 아플때 걸음을 맞춰주거나, 잠든 나를 깨우지 않고 내 몫까지 빨래를 널어주거나, 본인도 필요할텐데 기꺼이 물건들을 나눠주거나하는 배려를 많이 받았는데, 갚아줄 생각은 안하고 그저 받기만 하는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순례길을 씩씩하게 걷고있다고 스스로를 진취적이고 당차다고 멋있게 여겼던 내가 창피했다. 나의 진취적이고 당찬 모습 뒤에는 동행들의 희생과 봉사가 있었다.


내 단점을 직시하고 반성할 수 있었던 것도, 미약하게나마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동행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까예에 도착했다. 이미 먼저 도착한 동행들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나를 의자에 앉히자마자 샹그리아를 따라주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잘걸었다고 격려해주었다. 이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다니 정말 나는 운이 좋은 사람임을 다시한번 알 수 있었다. 산티아고 입성 하루 전날, 까예라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의 알베르게는 축제분위기였다. 우리는 들뜬 마음을 드러내며 축배를 들었다. 때로는 혼자일 필요가 있었고, 때로는 함께일 필요가 있었다. 그 순간은 명확하게 함께일 필요여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다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허벅지 윗쪽이 간지러웠다. 느낌이 쎄해서 자세히 보니, 붉은 반점이 여러개 모여있었다. 그 악명높은 베드버그에 물린 것이다! 베드버그에 물려서 고열에 시달리며 고름까지 차올랐다는 무시무시한 후기를 보고도, 나는 그다지 베드버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벌레퇴치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침낭을 주기적으로 햇볕에 말리는 등의 예방책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베드버그 걱정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며 순례길을 다니기 싫어서, 물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다녔다. 여태 잘 피해다니다가 산티하고 도착 하루 전날 물리게 되었다. 다행히 간지러움 말고는 딱히 증상이 없어서 침낭과 옷을 건조기에 돌린 뒤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베드버그에 물렸지만 두려움 따위 전혀 느끼지 않고 그저 기분좋게 그 순간을 누렸다. 원래라면 10시 전후로 모두 잠드는데,  그날만큼은 모든 순례자들이 아주 늦은 시각까지 호쾌한 분위기로 아무 걱정없이 즐겼다. 새벽에 걸을 때 너무 무섭지 않았느냐, 아침에 토끼가 들판 뛰어다니는 것은 봤느냐, 역시 갈리시아 지방 오징어 튀김은 미쳤다, 낮잠 잘때 코골이 범인이 누구였냐 온갖 얘기를 하면서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내일 도착하면 무슨 기분이 들까 상상해보았다. 그때의 감정은 도착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함께여서 무지 다행이고, 함께한 이 사람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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