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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도착

끝 그리고 감정

마지막날


순례길을 걷는 마지막날, 최종 목적지인 묵시아를 향해서 출발할 때는 안개가 자욱했다.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렸고, 거대한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가까이 있어도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날 이렇게 흐리다니 속상하다는 생각을 할 찰나에, 마법처럼 날이 개었다. 말도 안되게 파란 하늘이, 파란색 수채화가 아닌 유화로 칠한 것 같은 진한 파란색의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파란 하늘을 보면서, 나의 완주를 축복해주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괜히 찡했다. 한국에서는 새파란 하늘을 볼 기회가 별로 없는데,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혹은 높은 건물에 가려지니까)  순례길에서는 탁 트인 광경에 깨끗한 하늘을 매일매일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묵시아로 가는 길에는 오르막이 등장한다. 나무로 둘러싸인 숲길이라서 청량함에 기분이 한껏 고양된다. 나는 숲을 사랑한다는 것을 순례길에서 배웠다. 묵시아까지 걷는 순례자는 생각보다 별로 없어서, 거의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온전히 집중해서 길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오르막의 꼭대기에 도착했는데 하늘보다 더 짙은 바다가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저 황홀했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묵시아에 도착도 안했는데, 언덕 꼭대기에서 바다가 보이자 저절로 감동이 넘쳤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 내리막을 걸어갈 때에는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 노래를 들으며 갔다. 스페인어로 ‘살아있는 삶’을 뜻한다.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꼈던 그 때 소름끼치게 어울리는 곡이었다.



그렇게 나는 묵시아에 도착했고, 숙소에 체크인도 하기 전에 땅끝 비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정말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0km 표지석이 있었다. 그리고 펼쳐진 대서양 바다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왔구나, 마침내 도착했구나. 내 여행의 끝을 맞이했구나....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의 아쉬움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는 마음이 끝을 받아들이기로 했나보다. 눈물이 났다. 손등으로 훔쳐도 소용이 없을만큼 펑펑. 눈물에는 감사함이라는 감정만 존재했다. 이 곳까지 올 수 있었던 내 상황에 감사했고, 순례길을 여행하기로 선택한 나의 용기에 감사했고, 걷는 동안 나를 축복해준 자연에게 감사했고, 나와 마주친 나에게 인사를 해준 모든 순례자들에게 감사했다. 세상은 감사함 천지였다.


생장 출발부터 묵시아 도착까지 총 29일을 걸었다. 까리온에서 레온까지는 버스로 점프한 구간을 제외하고 걸은 총 거리는 약 780km. 최종적으로 발에 난 물집의 개수는 11개로 마무리 되었다. 11개의 물집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져서 굳은 살이 되었다. 왼쪽 네번째 발가락의 발톱은 곧 뽑힐 듯이 달랑거렸다. 피부는 생각보다 덜 탔다고 생각했는데 손목발목에 선 생긴거 보면 꽤많이 탄 듯 하다. 몸무게는 전혀 줄지 않았다. 한국 떠나오기 전에 6kg쯤 빼올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내가 웃기다. 허벅지에 베드버그 흉이 져있다. 딱히 신경쓰이지 않는다. 내가 그 순간 신경쓰고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내가 해냈다는 사실.


대서양의 일몰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기분 좋은 성취감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자기효능감이 나를 채웠다. 내가 해본 모든 경험 중 가장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제 나만의 색깔이 있는 사람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결심했다. 나는 언젠가 꼭 순례길을 다시 올거라고. 이 멋진 경험은 반드시 또 해야만 한다고. 까미노 중독에 걸린 것처럼 기회만 되면 순례길을 반복해서 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살다가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 다시 한번 이 길을 걸어야지. 때로는 혼자, 때로는 함께 걸으면서 단순한 패턴으로 살고, 자연에 휩싸인 채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경험을 꼭 다시 겪어야지.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를 탔다. 마드리드 공항으로 가기 전 여유 시간동안 산티아고 성당 앞 광장에서 순례자들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도착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밝고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몇몇은 감정이 차올라 울기도 했다. 동행들이 그들을 토닥여줬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뭉클해졌다. 사람들은 물구나무 서고 인증샷을 찍기도 하고, 여럿이서 그 나라 민속춤을 추기도 했다.  나처럼 한참을 거기에 앉아서 다른 순례자들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고, 말없이 맥주를 마시며 성당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언니오빠들과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충분히 구경했다 싶을 때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 일어났는데, 이탈리아 씩씩이들이 보였다. 여전히 씩씩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크게 얼싸안고 함성을 질렀다. 무리의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분명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너희들도 무사히 완주했구나, 축하해! 마음속으로 격려해주었다. 순례길 말에 자주 보던 기인 할아버지도 대성당에 나타났다. 여전히 트레이드마크인 마법사같은 옷을 입고, 아주 느린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모습이 어찌나 반갑던지! 길을 걷다가 만난 사람들을 대성당에서 만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들 나름대로 훌륭하게 끝까지 왔구나 싶어서 우리 모두가 대견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산티아고 순례길.


나는 순례길 전후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순례길을 걷는 중에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선명하게 변화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이 어리고 미숙하다는 나의 단점을 직시하면서 성장도 했고, 내가 어떻게 살고 싶어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등산과 자연을 좋아하게 되었고, 좋은 친구들을 얻었다. 화장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져서 민낯으로 다니게 되었고, 포도주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벌레도 별로 안무서워하게 되었고, 씨에스타를 그리워하며 주말엔 낮잠을 즐긴다. 지금도 내 방 책상 의자에 앉으면 정면으로 순례자여권이 보인다. 온갖 모양으로 생긴 도장들이 내가 걷던 모습을 증명해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너무 아름다운 풍경, 좋은 사람들,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내 모습.... 모든게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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