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3. 군더더기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터실터실


내 얼굴이 허옇게 터실터실 텄다.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걷다가 물의 도시 포르토마린에 도착했다. 그림 같이 아름다운 뷰를 갖고 있는 포르토마린에 도착하기 전, 우리 일행은 평소와 다름없이 배가 고파 얼른 샤워하고 최대한 빨리 점심을 먹고 싶었다. 숙소에 체크인 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빨래도 하지 않은 채로 식사를 하러 가는데, S오빠가 나에게 로션 좀 바르라고 얼굴이 또 텄다며 장난을 걸어왔다. 나는 원래 건성피부인데 로션을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여름이라도 피부가 튼다. 그래서 원래는 로션을 꼼꼼히 바르는데, 순례길에서는 샤워한 다음 아무 것도 바르지 않고 그냥 다닌다. 그래서 늘 얼굴이 터실터실했다. 로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나에게 꼭 지켜야하는 강박같은 루틴이 있다. 세안하자마자 화장솜에 스킨을 적셔서 얼굴을 닦아내고, 스킨을 얼굴에 톡톡 펴바른 다음, 수분크림을 듬뿍 바르고, 5분이라도 밖에 나가야하는 상황이면 선크림을 꼭 바른다. 그리고 거의 매일 파운데이션 등의 화장을 한다.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어느 하나 지키지 않았다. 일단 부피와 무게를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화장품은 당연히 챙기지 않았다. 원래는 샴푸, 바디샤워, 클렌징폼을 따로 쓰지만 머리, 몸, 얼굴을 씻기 위한 중성비누 하나만 배낭에 넣어왔다. (이 비누로 빨래도 했다!) 1박2일 여행을 가도 세면용품만 한가득 챙겼었는데 한달짜리 순례길은 오히려 심플했다.


놀라웠던 것은, 생각보다 그닥 불편하지 않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어서 오히려 편했다. 이를 통해 내 삶의 군더더기가 무엇인지 통찰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불필요한 것이 많았다. 없어도 되는 것들이 정말 정말 많았다.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아둥바둥 다 챙기며 살았을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향기 좋은 비누와 칫솔치약 뿐이었다. 군더더기가 무엇인지 알면,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정말 나에게 중요한 것들에 신경을 쓸 수 있었다. 얼굴에 펴바를 시간에 낮잠을 잘 수 있었고(낮잠은 중요하다!) 많은 양의 짐을 정리할 시간에 오늘 걸은 풍경의 아름다움을 회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군더더기를 빼려고 노력했던 나에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수영복이다. 나는 한여름 8월에 순례길을 갔기 때문에 야외수영장이 있는 마을에서 수영을 꼭 해보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그래서 배낭 한구석에 수영복바지를 고이 접어 넣어놓았는데, 막상 수영장이 없거나 혼자라서 부끄럽거나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식사를 위해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포르토마린의 야외수영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3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이 아니면 수영을 못한다는 생각에 동행들을 다시 한번 꼬시고, 빠르게 저녁을 먹고 설겆이를 하고 수영장으로 다같이 달려갔다.



“뛰어내려 브릿마리! 그냥 뛰어내리면 돼. 계속 기다리면 절대 뛰어내릴 수가 없어!” - 소설, <브릿마리 여기있다>


비키니를 태어나서 한번도 입어보지 않았다. 언젠가 꼭 비키니를 입어봐야지 생각만 계속했을 뿐이었다. 비키니를 입으려면 몸매가 완벽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몸매를 만들 때까지 기다리기만 헀다. 하지만 그러면 절대 비키니를 입을 수 없다. 잡지 화보 같은 비키니 몸매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굳이 그런 몸매를 갖춘 뒤에 비키니를 입어야한다는 법이 없었다. 사실 내가 비키니를 입건 말건 뱃살이 있건 엎건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 뭐가 그리도 신경이 쓰였던걸까. 그냥 입으면 될 것을.  


당시에 나는 저녁을 이미 배부르게 먹어서 배가 튀어나와 있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그런 것들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고 그냥 물에서 놀고 싶었다. 평소에 입던 스포츠브라탑에 배낭 속 깊숙히 박혀있던 수영복 바지를 꺼내 입고 수영장에 도착했을 때가 8시30분. 9시에 폐장을 하므로수영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우리밖에 없었다. 30분이라도 놀기 위해 종일요금을 지불하고 수영장에 입장했을 때의 그 위풍당당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벤져스 같은 포스로 등장해서 우리 밖에 없는 넓은 풀에 나란히 다이빙을 했다. 물은 스페인의 뜨거운 날씨에 지친 우리를 달랠만큼 시원했고 23일간 쌓여있던 피로를 한번에 풀어주었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다.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공이 길거리를 굴러오면 발로 찰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와 같다.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소설 <브릿마리, 여기 있다>


야외수영장이 보였다. 뛰어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피할 방법이 없었다. 물이 보이는데 몸을 담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본능에 가까운 충동이 들 때가 있다. 뭔가를 강렬하게 하고 싶다는 충동.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그 본능에 내 몸을 맡기는 것도 풍요로운 인생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순례길에는 이런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잔디밭을 보면 돗자리가 없어도 그냥 잔디에 드러누워 있고싶다. 숲에서 야생 블루베리를 발견하면 따서 맛보고 싶다. 그러면 그냥 했다. 순례길은 마음 속 깊이 있는 내면의 소리, 즉 본능에 따르는 방법을 알려준다.


수영장에서 30분동안 짧게 놀았지만 아찔할만큼 행복했다. 배영하며 물위를 미끄러질 때의 그 황홀함이 강렬했다. 수영복은 내게 꼭 필요한 짐이었다. 뱃살 걱정은 최악의 에너지 낭비였다. 뱃살 걱정이나하며 그 순간을 즐기지 못했다면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났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는 건 정말 나쁜 군더더기다. 뱃살이 좀 있으면 어때. 얼굴이 터실터실 좀 트면 어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거나,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에너지를 낭비한다면 그것만큼 멍청한 게 어디있을까. 비키니를 입고 수영한 것, 로션을 바르지 않고 다닌 것은 내게 삶의 군더더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순례길에서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순례길의 특수성 때문이다. 순례길에서는 완벽하게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나의 정체성은 오로지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였다. 따라서 외모나 직업 등으로 규정받지 않고, 오롯이 나라는 사람 자체로 길을 즐길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내가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가 중요하지, 나의 피부가 트던 뱃살이 삐져나오든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따라서 강박적으로 지키고 있던 제약을 떨쳐버리고, 군더더기는 모두 무시하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충만할 수 있도록 행동했다. 내 스스로가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이전 12화 12. 정면돌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