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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소원

내가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

철의 십자가


순례자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한 랜드마크가 몇개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것이 바로 철의 십자가다. 산 꼭대기 위에 있는 철의 십자가가 유명한 이유는, 각국의 순례자들이 살던 지역의 돌멩이를 가져와서 소원을 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출을 감상하며 뜨거운 눈물을 적셨다는 뜨거운 후기를 많이 본 터라 기대감이 높았다. 미리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다가 나 역시, 한국에서 작고 귀여운(무조건 가벼워야한다) 돌멩이를 골라왔다. 넓적하고 동그란 돌 위에 나의 소망을 또박또박 적고는 철의 십자가에 도착했을 때 그 길 위에 두고오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드디어 배낭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돌맹이를 꺼낼 날이 밝았다.


엘아시보라는 마을에 호텔식 알베르게가 있다더라, 초호화에 수영장도 있다더라 하면서 다시한번 동행들보고 엘아시보까지 가자고 꼬셨다. (그때도 산티아고까지 이들과 함께할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루하루 그날그날 각자의 일정을 정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한번 능글맞은 나의 꾀임에 넘어온 동행들은 엘아시보에서 만나기로 했다. 무릎이 좋지 않았던 B오빠와 후배로서 그를 챙겨야하는 C오빠는 조금 뒤쳐져서 우리와 따로 걷고 나머지 4명이서 함께 철의 십자가로 향했다. 많은 순례자들이 일부러 철의 십자가에서 일출을 보려고 아주 일찍 일어나는데, 딱히 관심이 없었던 우리는 평소처럼 일어나서 걸었다.


근데 너무 추웠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벌벌 떨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판초우비를 꺼내 입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강해서 판초우비가 심하게 펄럭펄럭 요동을 쳤다. 심상치 않은 날이 될 것임을 새벽부터 느낄 수 있었다. 산을 오르면서 날씨는 개었다. 나는 원래 걸을 때 음악을 틀고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소리나 새소리를 이 곳이 아니면 듣기 힘들 것 같아서 자연이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따로 음악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N오빠가 아침에는 이 노래를 들어야지! 하면서 김동률의 출발을 틀어주었다.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테니까. - 김동률, 출발


가사가 순례길에 최적화 되어있다. 특히,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는 부분에 많이 공감이 되었다. 순례길의 의미는 걷는 순간엔 잘 와닿지 않는다고 한다. 걸을 때에는 그냥 묵묵히 아무 생각없이 걷기만 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 경험이 나의 삶에 어떤 전환점이 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순례길의 진정한 의미는 걷고 난 뒤 6개월이 지나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때 서서히 ‘아, 그 길이 이런 의미였구나’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순례길의 의미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순례길을 다녀온 지금도 출발 노래를 들으면 설렌다. 넷이서 가사에 공감하며 걷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후에는 날씨가 변덕스럽게도 새벽보다 더 짖궂어졌다. 비가 내렸다. 안개가 자욱해졌고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무념무상으로 걷다보니, 맞이할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철의 십자가가 턱하니 나타났다.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당황스러울정도로. 철의 십자가 주변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돌멩이들이 높게 쌓여있었다. 돌멩이 뿐만 아니라 각종 기념품과 사진 등이 군데군데 흩어져있었다.



(위 사진을 보고 등이 굽었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배낭을 메고 그 위에 판초우비를 입은 뒷모습일 뿐이다.)


흐린 날씨에 만나서 아쉽기는 했지만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기에 소중한 순간이었다. 보조가방 속에서 내 돌멩이를 꺼내어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god의 팬인 Y언니는 god 굿즈를 가져와서 걸어두었다. S오빠와 N오빠는 등산스틱으로 바닥의 돌에 즉석으로 이름을 새겼다. 나름의 의식을 치르며 그곳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주변의 돌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이 모두 따뜻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내용이 거의 전부였다. 이 곳을 지나갔던 많은 순례자들의 소망이 느껴졌다.


내 돌멩이에는 ‘화목한 가정’이라고 쓰여져 있다. 나의 인생 최종 목표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유지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비교적 일찍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일상을 공유하며 따뜻하게 서로를 보듬어주는 관계 속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생활한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극복해낼 힘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다. 행복에 대해서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행복에 있어서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관계 중에서도 가장 가까우면서도 소중한 것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에 나는 돌멩이에 이렇게 적었다. 화목한 가정.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가정을 꾸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상형도 분명하다. 나와 목표가 같은 사람.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노력할 온화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내 인생목표를 위한 중요한 과제였다. 인생목표가 뭐이리 시시한가, 일생일대의 과제가 뭐그리 미미한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때에 행복감을 느끼는 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내 기준에서는 결코 사사롭지 않다. 내가 어떤 것을 원하는 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노력의 방향이 분명하게 정해지니까.



철의 십자가를 지나서 우리는 엘아시보에 모였다. 늦게 도착한 두 사람까지 합해서 6명이 모두 호텔식 알베르게에 감탄했다. 비온 뒤기도 하고 산 속에 위치하기도 해서 너무 추워 수영장에 발 한번 못담가봤지만, 모두 만족도 최상의 숙소 컨디션에 행복해했다. 이날 호텔에서 먹은 저녁은 순례자 메뉴 통틀어 가장 맛있었고, 후식으로 하몽에 멜론을 함께 먹으니 입 안에 황홀함이 번졌다. 일몰 무렵(해가 길어서 오후 9시는 되어야 해가 진다) 테라스에서 감상한 일몰은 자동차CF 마냥 그윽했고, 여섯명이서 다같이 우리만 있는 방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평온함이 공기에 가득찼다.


난 이래서 음악이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그게 바로 음악이야 - 영화 비긴어게인


학생 시절, 기숙사 방바닥에 앉아 사감 선생님 몰래 소등시각 이후에도 밤새 수다를 떨던 그때가 떠올랐다. 다시는 그때같은 느낌으로 놀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27살부터 36살까지 6명이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다른 방에 방해될까 조그맣게 이야기하면서 소소하게 웃고 떠드니까 그 순간이 너무 행복스러웠다. 그때 배경음악으로 한곡반복으로 깔아 놓았던 음악이 샘 스미스의 Midnight Train이었다.  음악이 그 순간을 진주알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감미로운 음악에 취해 맥주에 취해 진주알같이 뽀얀 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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