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용기
부엔 까미노
스페인어로 ‘좋은 길’이라는 뜻이다. 길 위에서 순례자들에게 응원해주는 인삿말로 쓰인다. 순례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은 아주 쉬운데, 일반 마을 주민과는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크고 작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대부분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질을 달고 다니며, 걷기 편한 복장을 하고 다닌다. 순례자인 듯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부엔 까미노’라는 인삿말과 함께 미소를 지어주면 된다. 그러면 내게도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부엔 까미노’가 되돌아온다. 서로를 격려하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조성되는 순례길에서는, 쉽게 유대감을 느끼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저절로 생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걸으면 용기가 전염된다.
다들 하룻동안 걸을 수 있는 시간과 거리가 비슷해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에서 출발하면 오며가며 자주 마주치게 된다. 누구 하나가 아예 버스로 일부 구간을 점프하거나, 며칠간 한곳에서 쉬지 않는 이상, 어제 만났던 사람은 오늘 또 만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늘 만난 사람은 내일이든 모레든 마주치기 쉽다. 그래서 자주 만나고 자주 인사하면서 아예 낯이 트게 된 순례자들이 많이 생긴다. ‘안녕? 오늘은 컨디션 어때? 물집 몇개 생겼어? 어디까지 갈거야? 날씨 정말 덥다. 좋은 길 보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가 자연스럽게 늘게 되는데, 어느 순간 안보이면 어디 다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실제로 부상을 입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자주 마주치면서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은 한 무리의 이탈리아인들이었다. 출발지에서 처음에 마주쳤을 때는 데면데면 서먹서먹했지만, 하도 자주 마주치니까 서로의 존재감이 뚜렷해졌다. 내가 그들을 기억하는 키워드는 ‘젊음’이었다. 항상 씩씩하게 힘찬 걸음으로 걷던 그들은 나이대가 다양했다. 백발의 수염이 멋진 할아버지도 있었고, 너무 앳되보여 사춘기 17살 소년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 같이 ‘난 젊어!’라고 뿜어내는 에너지가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파란 티를 입은 배가 불룩했던 아저씨는 점점 배가 홀쭉해졌다. 주황티를 입은 청년은 점점 수염이 자라서 제법 근사한 턱수염을 가지게 되었다.
열번째 날,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우비를 입고 맞바람을 가르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다가 이탈리아 씩씩이 무리를 만났다. 비가 꽤나 세게 와서 자연스레 근처 마을의 바에 함께 들어갔다. 그 바는 알베르게를 겸하고 있는 식당이었는데, 음료를 마시면서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 날의 목표거리를 이미 다 채웠지만, 힘이 꽤 남아서 더 걷고 싶었다. 하지만 날씨가 궂었기에 결국 그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씩씩이들은 체크인은 하지 않고, 계속 그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머물렀다. 내가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식사를 하고, 낮잠을 잔 뒤까지도 그들은 계속 술을 마시며 쉬기만 했다. 쟤들은 왜 체크인 안하고 저렇게 세월아 네월아 술만 마실까 의아하기만 했다.
그러다 해가 질 무렵 9시 즈음에 갑자기 그들이 분주해졌다. 비가 오는 어두운 밤에, 술에 취한 채로 식당 주인에게 큰 비닐봉지를 몇장 얻더니, 머리구멍과 팔구멍을 뚫고 그걸 뒤집어 쓰고는 출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기를 쓰고 있는 내게 와서, “우리는 밤새 걸어서 브루고스에 갈거야! 너도 함께 갈래?” 하고 물었다. 브루고스는 거기서 46km 거리에 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취한 채로 밤에 걷는다니, 그것도 비오는 밤에! 그러면 잠은 언제 자고, 숙소는 어떻게 구하며, 씻기와 빨래는 어떡하려고? 게다가 운 나쁘게 어둠 속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진지하게 그리고 장난스럽게 “너네 미쳤어?”라고 물어보았다. 유쾌하게 웃으며 나도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그들에게, 나는 미치지 않았으니 내일 해가 뜨고 뒤따라 가겠다고 거절했다. 제발 발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라고 걱정도 해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정말로 비오는 밤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채로 떠났다. 웃기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고, 저건 치기일까 용기일까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단칼에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저런 미친 짓을 해보겠어 생각도 들고, 충동적이고 모험적이고 똘끼 충만한 그들이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안전지향에 계획파인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그 추진력이 놀랍기만 했다.
씩씩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마추쳤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어느 작은 마을의 성당 앞 잔디밭에서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씩씩이들을 만났다. 전날 밤, 빗속을 헤매다가 중간에 숙소를 구할 수가 없어 노숙을 선택한 그들은 잠에서 깬지 얼마 안된 것처럼 몽롱하게 앉아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나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당연히 괜찮다고,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아마 그 당시에는 힘들었겠지만, 시간이 지나서는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좋은 추억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로서는 절대 엄두도 못낼 재밌는 추억을. 이게 내가 그들을 ‘젊음’이라는 키워드로 기억하는 이유다.
그 날, 나는 젊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젊음의 가장 큰 특징은 용기라고 결론 지었다. 젊음은, 일이 잘못되더라도 잃을 게 별로 없다는 태도로, 용기를 내서 뭐든 도전해보는 것이다. 젊다는 것은, 절대적인 나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에 대해서 거침없이 시도해보는 용기를 기준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나는 혹시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어쩌지, 혹시 컨디션 관리에 실패해서 다음 날 걷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에 휩싸여 밤산행은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그래봤자 노숙하거나 하루 쉬어가는 정도의 일만 일어날 뿐인데 뭐가 그리 무서워서 몸을 사리고 있었을까.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용감하지 못했다. 나는 젊지 못했다.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영화 속 벤자민은 20초의 용기를 내서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같이 아름다우신 분이 왜 저 같은 사람을 상대하고 있나요?” 그러자 근사한 일이 일어났다. “안될 거 뭐 있나요? (Why not?)”
움츠리고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강렬하게 기억하는 인생의 장면들은 모두 용기를 내서 시도한 결과였다. 눈 딱 감고 20초만 용기를 낸다면, 평생에 잊지 못할 다채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뭐 어때? 왜 안돼?(Why not?)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해지자. 생각보다 최악의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아. 내가 시도하는 폭 만큼 내 인생이 넓어질 것이다. 이런저런게 두려워서 가만히 있으면, 내 젊음이 너무 아깝잖아.
이탈리아 무리의 씩씩함에 자극을 받아서 나는 더 열심히 걸었다. 나 또한 씩씩해 보이고 싶었다. 마주쳤을 때 고통에 힘겨워하며 빌빌거리는 연약한 모습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게 많은 쫄보의 모습이 아니라, 용감하고 당당하게 한발 한발을 옮기면서 이 길을 즐기는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생생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이 길을 정복해나가고 있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건강하고 나만의 페이스에 맞게 힘차게 걷는 근사한 이미지로. 그렇게 걷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순례길에서 내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그 길을 씩씩하게 걸었다. 씩씩이 이탈리아 무리들도 나를 젊음 그 자체의 씩씩한 사람이라고 기억하기를. 용기는 그렇게 전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