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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Oct 13. 2019

당신이 건넨 미안함들

처음에 묶여있던 사람

장소가 문제라면 돌아서면 될 것이고, 시간이 문제라면 두꺼운 커튼을 치고 죽은 듯이 자면 될 것이고, 사람이 문제라면 보지 않고 살 면 될 것인데. 마음이 문제라면, 마음이 사랑이라는 난제를 만들어 버린다면 도대체 우린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요?



하나의 장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곳엔 당신이 었었다. 그래 이제는 없으니 "있었다"의 과거형이라고 하자.

함께했던 시간과 당신이 머물러 있었던 장소. 그 모든 것이 이젠 과거형이 되었음에도, 그 모든 것에 누가 했는지 이제는 중요치 않은 마침표가 찍혀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한 때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없었던 것처럼 살아야 함에도, 그럼에도 지금의 내가 잘 사는 것은 내가 모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환했던 시간과 장소와 당신이 이제는 언제였는지, 어디였는지, 누구였는지 기억 저편에 희미해진 것은 간절했으므로 다 바쳤고, 다 바쳤으므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까닭이다.

사람이 그 어느 존재보다 뻔뻔하게 행복을 좇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망각 때문이다. 잔인한 망각. 때로는 진실과 사실마저 왜곡시켜버리는 이기적인 망각. 하지만 그 망각으로 우린 지금을 연명하고 있다. 바라봤던 풍경에서 한 발자국 떨어질 수 있는 것도 결국 망각 덕분이다. 분명히 있었던 것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망각은 때론 독한 술보다 더 위력적이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의 끝을 먼저 생각해버리는 습관이 있다. 첫 페이지를 막 넘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들춰 보기도 하고, 이제 막을 내린 드라마를 마지막화부터 거꾸로 보곤 한다. 원고를 쓸 때도 달력 위에 마감날을 빨가게 동그라미 치고 나서야 첫 문장을 시작한다.

끝이 있는 모든 것이 좋았다. 희미한 시작보다 선명한 슬픈 결말이 더 좋기도 했다. 어쨌든 끝이 있다면 지금이 소중해지니까. 그래서 당신과의 시작은 희미하지만 돌아서야만 했던 그 끝은 차라리 선명하다. 감정의 마침표는 나의 모든 걸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시작이 어떠했든 결말만 괜찮다면 난 다 괜찮다,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당신은 아니었다.

나와는 반대편의 세상에 서 있는 그런 사람. 당신은 항상 처음을 생각했다. 처음이 전부라고 확신했다. 그 처음에 당신의 모든 걸 묶어 놓고는, 그 처음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멀어지지 못하는 사람.

그와의 처음을 잊지 못해서, 그와 함께이지 않은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먼 곳으로 튕겨져 버린 당신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함 70%에 안타까움 30%로 이루어진 나의 모든 위안은 당신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도무지 가 닿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난 매일 당신을 붙들고 한참이나 떠들어댔다. 처음은 잊어버리고 지금보다 더 괜찮을 수 있는 내일을 희망하라고. 그것이 온전히 당신 자신을 살 수 있는 길이고, 그나마 당신이 인도에 온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거라고. 이미 끝나버린 사랑은 그것으로 정말 끝인 거라고. 처음을 기억하려는 사람과 확실한 마침표를 찍겠다 다짐한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인도는 그렇게 당신과 나 사이에 선명한 선을 그어놓았다. 우리는 각 진영의 대표주자 같았다.



한 번 등을 돌려버린 사람은 행여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언젠간 다시 그 등을 보이며 떠날 사람이다. 처음 떠났을 때와 같은 이유로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로부터였던 한 번 마침표가 찍힌 사랑은 다시는 이어지기 쉽지 않는다는 말이다. 남겨진 사람의 몫은 그것을 곱씹으며, 그리워하며, 혹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현실을 허비하고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 시절 누군가를 사랑하며 최선을 다했던 스스로를 사랑하면 된다. 그뿐이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고 누군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난 그게 맞다 믿고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게 잘 안된다고 했다. 그게 맞지 않다고 했다. 그와 사랑을 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여전히 파리의 골목 이곳저곳에 묻어 있다고.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침대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고, 냉장고 안의 생수병에 그의 향기가 여전히 묻어 있으며, 당신만 기억하고 있는 그의 온기가 아직까지 침대 위 이불을 데우고 있다고 했다. 그가 없는 파리는 더 이상 파리가 아니었으므로, 당신은 파리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와는 먼 곳, 인도까지 날라 온 것이다.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도망쳐온 먼 곳에서조차 그를 잊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당신은 이곳에서조차 ‘여전히’인 것이다. 함께 나누었던 감정의 모든 것들에 그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당신에겐 여전히 ‘여전히’로 남아있었다.

냉정한 사랑의 엇갈림이다. 애초에 그와의 시작을 붙잡고 있는 당신과, 당신과의 끝조차 이미 추억이 돼버렸을 그는 파리에 함께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그를 잊지 못했으므로 결국 파리를 떠나 도착한 인도 캘커타의 서더스 트리트도 당신에겐 그와 함께 머물렀던 파리의 작은 골목이 되어버렸다. 물리적인 거리의 광활함이 정서적 간격을 더욱 좁혀버렸다.



슬픈 일이다. 한 사람은 들리지도 않는 먼 곳에서 듣지도 않으려 하는 상대에게 계속해서 사랑한다 말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미 마음을 닫아 버렸다. 마음이 닫혔는데 귀가 열리겠는가. 마음의 마침표는 잔인한 철옹성과 같다.

많은 말들로 이미 끝나버린 사랑을 당신에게 이해시키려 해 봤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당신은 그에게 건넨 모든 사랑이 미안함이 되어 버렸다고 했다. 진심을 담은 사랑의 감정을 하나하나 건넬수록 당신은 자꾸 그에게 미안해졌다고. 분명 사랑을 먼저 접어버린 것도 그였고, 잘못을 한 것도 그였고, 그것을 용서해준 사람은 당신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결국 당신의 마음에서 돌아서버린 그 앞에서 큰 잘못을 한 어린아이처럼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여전히 그에게 건넸던 모든 마음이 미안하기에 자신의 사랑은 아직 진행 중이라던 당신에게 난 무엇을 말해주려 했을까. 결국 당신에게 건넨 나의 말은 위로가 될 수 없었고, 당신 또한 나에게 위로를 바라지 않았었다. 우리의 대화는 닿지 않는 평행선이었다.



견뎌내고 버텨내며 힘들게 살아봤지만, 결국 좋았던 모든 순간이 처음에 묶여있는 사람. 그래서 기어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사람에게 앞만 보고, 앞으로의 삶을 희망하라고 하는 것만큼 모진 말이 또 있겠는가. 결국 당신의 삶은 그에게 묶여있고, 먼 곳에 와서도 마음이 향하는 목적지가 그 사람이라면 결국 당신은 그쪽으로 걸어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다. 비록 그 목적지는 당신의 삶에서 영영 퇴장했음에도.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조금씩 지워가는 것이 맞다. 그런데 당신은 잊혀가는 작은 것 조차에도 온몸을 덴 듯 아파했다. 마음이다. 당신의 마음이 장소와 시간과 그 사람을 붙들고 있다. 떼어놓으려 할수록 더욱더 단단하게.

마음이었으므로 그리워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함께 따듯한 챠이를 마셔주는 것. 숙소 테라스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그냥 당신을 바라봐주는 것. 마지막으로 당신이 더 이상 그에게 건넸던 마음에 미안해하지 않길 바라는 것. 그래서 언젠가 당신의 파리가 다시 아름다워지길 희망해본다


쏟아져 내렸던 사랑은 결국 소나기일 뿐이라고 백 번 말해봤자 영영 끝나지 않을 장마에 갇혀 우산도 없이 혼자 서있는 당신은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구름 사이로 다시 떠오를 환한 태양을 희망하지 못했다.

건네 버린 사랑이 모두 미안함이 되어 버렸다는데, 그래서 도무지 살아갈 힘이 안 난다는데, 거기에 무슨 위로가 필요하겠는가. 세상 어떤 것이 소용 있겠는가.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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