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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Nov 10. 2019

칫솔

당신이 지나간 시간들

1.

매번 칫솔을 챙겨서 우리 집에 오던 네가 어느 날엔가 나에게 새 칫솔을 하나 달라고 했다.

이왕이면 예쁜 핑크색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누군가 와도 여자가 있는 집이라고 알 것이라며. 내심 나의 공간에서 네 자리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너의 그런 작은 욕심이 귀여웠다. 그날부터 우리 집 화장실엔 칫솔 두 개가 놓여 있게 되었다. 파랑과 핑크.

이곳엔 두 사람이 있고 , 그 두 사람이 밥을 먹고 있으며,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넌지시 말해주는 칫솔들.

네가 우리 집에 오지 않는 날에도 난 세수를 하다, 양치를 하다 문득 너의 칫솔을 발견하고는 조금은 설레고 벅차서 마음이 간지럽기도 했다. 치약 거품을 머금은 채 피식 웃기도 했었다.

진짜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핑크색 칫솔 때문에 난 몇 개의 행복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2.

넌 양치에 관해 어떤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삼삼삼이라는 법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은 내 주위에 아마도 너뿐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세 번, 밥을 먹고 난 삼분 이내에, 삼분 동안 닦을 것.

마치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되는 마냥 삼삼삼을 외치며 귀찮아하는 나를 닦달하기도 했다.

여전히 새것 같은 내 파랑 칫솔과는 다르게 꽤나 야무지게 양치를 했던 너였기에 너의 핑크 칫솔은 금세 가운데가 푹 파였다. 패인 그곳의 크기는 네 어금니의 크기였을 것이다. 양치에 관한 너의 강박의 크기였고, 네가 우리 집에 머물렀던 시간의 크기였고, 결국 우리 사랑의 크기였다.


3.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다.

시간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빠르게 흘러가버렸고 그것에 지지 않으려 나는 아등바등했다.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빠르게 달려가는 시간에 달라붙어 있었다.

자취방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 친한 친구가 이삿짐 싸는 걸 도와주러 왔다.

부엌 서랍을 정리하던 친구가 낡은 핑크색 칫솔을 발견하더니 버려도 되느냐 물었다. 너의 칫솔이었다. 가운데가 푹 패인. 내가 잊고 있었던 너의 핑크 칫솔.


군대를 가기 전, 자취방의 짐을 정리하면서 핑크 칫솔을 버리려던 너에게 난 그냥 두라고 했다. 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네가 함께했던 집에서, 네가 없었던 집에서 나에게 핑크 칫솔은 너였으니까. 너와 함께 보내왔던 시간의 자취였고, 앞으로도 함께 할 시간의 약속이었다. 그때 나는 우리를 확신했었고 나 자신을 자만했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명한 생체기를 남겼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4.

멍하니 너의 핑크 칫솔을 바라봤다. 희미하지만 너의 양치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나와 먼 곳, 내가 없는 어딘가에서도 여전히 삼삼삼을 외치며 양치를 하고 있을 너의 모습도 상상해본다.

작은 사물 하나에 엉긴 기억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한다. 풀린 실의 끝자락을 붙잡고 당신이 지나간 시간들을 곰곰이 되돌아본다. 그 시간 몇 가닥에 놓여있던 우리의 따듯했던 기억들. 그것만으로 충분했고 그것이었기 때문에 행복했던 마음들.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조용히 안녕을 건네본다.



* 매거진 <사물의 언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아 작성된 픽션입니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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