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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Sep 13. 2018

100%의 미용실을 찾는 일에 관하여

내가 단골 미용실을 만들지 않는 이유

어깨 밑으로 머리를 길러본 게 언제였더라.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갑갑하게 덮는 거지존에 돌입할 때, 중력의 힘을 거스르고 머리 끝이 뒤집어지기 시작할 때부터(feat. 따귀소녀) 고민은 시작된다. 이번엔 어느 미용실로 가지. 머리는 어떻게 하지. 


만성 단발병 환자인 나는 적어도 1달 반~2달에 한번은 미용실을 찾는다. 이 정도면 거의 이발 수준이지만 단골 미용실은 없다. 아직 단골 미용실을 만들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만들지 않는 건가. 


고등학생 나오는 웹드라마 보다가 단발병 재발...손님 이건 도하나예요(@플레이리스트)

다행히 내가 사는 동네에는 매번 다른 미용실을 찾아도 될 정도로 미용실이 매우 많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머리가 마음에 들어도 3번 이상 같은 미용실을 찾는 경우는 잘 없었다. 내게 단골 미용실이 없는 이유는 

 

첫째, 미용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  


9년 가까이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지만 나는 전형적으로 내향적인 인간이다.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힘들어하고 대화와 대화 사이 ‘마’가 뜨는 어색한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그래서 취재 기자를 오래 못 했나...). 


무엇보다도 

어디 사세요? 결혼은 하셨어요? 어머, 아이가 있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여요. 어떤 일 하세요?

이런 대화를 왜 처음 보는 사람과 나눠야 하는 걸까 라는 근원적 의문을 가슴 깊숙이 갖고 있다. 


알고 있다. 처음 만나는 고객과 매번 아이스 브레이킹을 이어가야 하는 미용사의 고충을. 사람들은 미용실에 머리만 만지러 오지 않는다. 호구 조사를 통해 서로를 알아 가고 속내를 터놓고 친해지면서 단골이 된다. 머리를 만지면서 관계도 함께 만들어간다. 미용사가 감정노동자인 이유다. 그래야 한번 왔던 손님이 또 오니까. 쉽게 말해 영업이 되니까. 


미용실에서는 머리만 했으면 좋겠다(@unsplash)


하지만 나는 이런 감정노동이 불편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 감정노동의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다. 미용실에서는 머리만 했으면 좋겠다. 물론 어떤 미용사에게는 나 같은 사람이 더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미용사가 말을 걸 때면 최대한 웃으며 단답형으로 이야기한다. 눈치 빠른 미용사들은 이 사람은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는구나 간파하고 대화를 멈춘다. 그래도 계속 말을 이어가는 친화력 좋은 미용사라면? 다음번에 가면 더 대화가 많아진다. 그럼 그 미용실에는 발길이 다시 가지 않는다(지랄 맞아 죄송합니다...). 



새로운 미용실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모험을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범생이의 길을 걸어온 나는 외모 역시 무난, 평범, 심심하다. 


내 인생의 두발 자율화가 시행된 지가 언제인데 머리 모양은 중고등학생 때 그대로, 단발에서 어깨까지 길이를 무료하게 오간다. -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p.36 


부지런히 미용실을 오가지만 헤어스타일은 늘 거기서 거기. 머리가 너무 뻗친다 싶으면 파마했다가 너무 빠글거린다 싶으면 풀었다가 미용실 자주 가는 거 지겨우니 길렀다가 역시나 여자는 단발이지 또 잘랐다가 단발머리는 손이 너무 많이 가니까 길렀다가 파마했다가 풀었다가... 

 

재밌는 건 ‘짧게 잘라주세요’ 똑같이 주문해도 미용실마다, 미용사마다 다른 머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더 짧게 잘라도 괜찮다 해도 이것보다 더 짧으면 이상하다고 조심스러워하는 미용사도 있고, 본인은 모험하는 걸 좋아한다며 팍팍 쳐내는 미용사도 있다. 심지어 같은 미용실, 같은 미용사에게 ‘지난번처럼 잘라주세요’ 해도 다른 헤어스타일이 나오기도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까. 


사각사각, 머리가 잘려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개운해진다(@pexels)


언젠가 한 지인이 자신은 미용실 가위 소리,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소리, 드라이기 소리에 집중하고 싶어서 미용사가 말을 시키는 게 싫다고 한 적이 있다. 나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잠시나마 타인에게 내 운명을 맡겨 놓고 내 머리가 어떻게 변할까 기대하며 거울 속을 바라보는 시간이 설렌다. 예상치도 못한 머리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럼 또 기르면 그만이니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뭔가 새로운 걸 해본다는 게 어려워지는데 내 머리만큼은 내 마음대로 해볼 수 있다. 그래 봤자 과감한 시도는 못해보지만. 


물론 이게 다 머리숱이 많고 머리가 빨리 기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함정(여러분 부러우면 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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