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유행했던 말들, 뭐랄까 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수험생이고 공시생이고 R=VD를 외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던 것 같고 늦게 공부를 시작한 나의 정신력을 잘 붙들어줬던 책 몇 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라진 게 맞는지 모르겠어서 조심스럽긴 하군.) 자기 계발서, 꿈꾸는 다락방이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 책은 꿈노트를 쓰길 권했었다. 내가 하고자, 사고자하는 것들을 노트에 모두 적거나 사진을 붙여두고 생생하게 꿈꾸라는 것이 요지였다. 나는 그때 크라프트 표지로 된 작은 노트에다가 당시 사고 싶었던 DSLR과 이것저것을 적어뒀었다.
그리고 후에 정말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금전적으로도 나아진다면, 하고 싶은 일을 썼는데 그중 절반은 '000에게 식사 대접하기'였다. 그 000은 나의 선생님이기도, 친척이기도, 친구의 부모님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랑이 고픈 나에게 크고 작게 다정을 담은 손을 건넨 사람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고 불쌍한 문장들인데, 나는 정말 애정을 갈구하고 다녔다. 막 구걸했다는 것이 아니라, 받아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누군가가 작은 온정이라도 베풀어주면 그걸 꼭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어른이 아이에게 베푸는 선의라는 생각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모든 애정들이 특별했다. 옆의 친구나 혈육들처럼 그냥 받아들이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애정은, 그런 걸 잘 못 보고 자란 아이에겐 자극적이다. 왜 나한테 이렇게 밥을 해주지? 맛있는 걸 사주지? 왜 저렇게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지?... 그런 것들 말이다.
그 애정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이 나의 꿈노트를 마치 빚노트 같은 모양새를 하게 했다. 이 애정은 특별한 것이니, 나는 이 빚을 갚아야 한다. 뭐 그런 생각까지 갔던 것 같다. 사촌들과 함께 받게 된 작은 스티커 한 장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노트를 썼던 건 약 10년 전이다. 고등학교 2학년쯤 썼던가. 그때는 정말, 내가 보이는 것과 다르게 돈이 없고 쪼들려서 그걸 잔뜩 숨기고 지냈다. (쪼들려 보였다면 할 말은 없다.) 친구들은 아이폰이니 갤럭시니 하루가 다르게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새로운 것들을 공유하고 사는데 나는 나의 통신비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순간이. 학원비를 내지 못해서 학교에서 야자를 하며 선생님들을 쫓아다녔던 기억도, 집에서의 생활이 너무 힘이 들어 당시 담임이었던 도덕선생님을 붙잡고 면담을 신청했을 때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담임 선생님에게 내 가정사와 경제사정을 갱지에 가득 적어가며 전했을 때도. 매일 집에 가기 싫어 저녁이 되도록 친구네 집에서 놀고 낮잠 자고 밥을 얻어먹을 때도.
빌어먹게도 다 기억이 나기 때문에
나는 정말 잘 살아야 했다.
왜냐면 그들은 최소한
나를 내치진 않았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악착같진 않더라도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나를
'기특해' 했기 때문에.
그건 정말로 내리사랑이었기 때문에.
약간 삼천포로 빠진 것 같지만 요지는 같다. 나는 (애정의) 빚도 갚아야겠고 그때 나를 도와준 누군가들에게 감사함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는 인간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 잘 살아야 했다.... 잘 산다는 건 무엇인가. 이 문제는 너무 심오하니 지금 들어가지는 않기로 하자. (이걸 쓰는 지금은 새벽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까지 들어가면 정말 아침 해를 만날 것 같다.)
돈문제는 언제나 나를 따라왔기 때문에(물론 지금도 그렇다. 내가 자라는 만큼 그 친구의 크기도 달라졌을 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아르바이트를 끊임없이 했었고, 졸업과 동시에 취직했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생기고 나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속의 응어리처럼 남아있던 빚을 청산(!)할 때가 온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는 절대 아니다.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싶었다.
은사님들에게는 때가 되면 문자나 카톡을 남겼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홍삼절편을 들고 담당 교수님을 잠깐 뵈러 갔다가 대학원생이 될 뻔했지만, 교수님은 내가 연구직에 뜻이 없다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에 빠져나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아가신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의 추모공원에도 1년에 한 번은 꼭 가려고 한다. 이건 누가 보는 것도 아는 것도 아니지만, 다녀오면 괜히 마음이 편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선생님들이야 워낙 내가 사랑도 쉬이 받았고 그들에게는 정말 몇백 명의 제자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연락드려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친척들은 조금 어려웠다. 정신없이 커버린 나와의 사이가 약간은 어색하고, 내가 뭘 해드린다 하더라도 그만한 가치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러던 중에,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삼촌이 딸을 낳게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이 생긴, 아주 어린 동생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정말 안 예뻐할 수가 없더라. 명절에 집에 오면 숙모 대신 안아주고, 재워보기도 했다. 말랑콩떡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아기는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조카뻘 되는 동생이 꽤나 귀여웠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거다.
사랑은 당사자에게 되돌려주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주는 것이구나.
삼촌은 내가 어릴 적에 나를 잘 챙겨줬었다. 나도 삼촌과 결혼할 거라는 망언(?)을 할 정도로 잘 따랐었고, 내가 크면서도 삼촌은 어색하게나마 밥도 사주고, 어울리진 않았지만 옷도 사주며 나를 챙겼다. 나는 그게 어색했지만, 습관처럼 꼭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은 애정을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 꼭 삼촌에게 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챙겨주어 잘 자랄 수 있었던 나처럼, 물론 나와는 다르게 많은 사랑을 받는 나의 어린 사촌동생을 챙겨주면 되는 것이다. 귀여운 옷을 사서 보내고, 가끔 얼굴을 비추고 하는 것이 꽤 즐거웠다. 삼촌 역시 기뻐 보였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무겁게 짊어졌던 마음의 보따리가 조금씩 풀렸다. 낑낑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난 이제 내가 가진 사랑을 가지고 넓게 펼쳐 내 동생들에게, 훗날 생길 조카들에게 하나씩 쥐어주며 그들의 부모가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알려주면 된다.
사실 오늘은, 내 옷장 한켠에 있는 편지에 대한 보답 아닌 보답을 하고 왔다.
내가 처음 월경을 시작했을 때, 물론 모두가 축하한다는 얘기를 해줬던 것 같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뭔가는 딱 한 명, 작은 고모가 유일했다. 고모는 두어 번 편지를 써줬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 초경 때이다.
그때 나에게 준 편지는 벌써 15년이 넘도록 내 옷장에 있다. 속옷을 넣는 곳 옆에 항상.
한 번도 제대로 고맙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사촌동생 중 제일 막내인 작은 고모의 딸이 지금 딱 그때의 내 나이이다. 문득 궁금해져 할머니에게 그 친구가 초경을 시작했는지 물었는데 아직 초경 전이지만 주니어브라는 입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실 몰래 구매해서 보낼 생각이었지만, 고모네와 함께 저녁을 먹던 할머니가 내 옆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나는 난데없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정제되지 않은 진심이 더 의미가 있다고 했던가. 띄엄띄엄 고모가 그때 준 엽서를 아직 가지고 있고, 그때를 아직 기억하고 고마워하고 있기 때문에, 시호가 초경을 하게 되면 꼭 챙겨주고 싶다고 전했다. 평생 냉미녀 같이 살 줄 알았던 고모도 너스레를 떨면서 '그럼~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하며 웃었다. 고모는 결혼 전에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잘 다녔는데, 고모의 회사 사람들이 고모에게 딸이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도, 방학 때 문화생활을 해야 할 때도 콘서트니 뮤지컬이니 분에 넘치는 경험은 다 고모가 챙겨주었으니 그런 소문이 돌아도 이상할 게 없긴 하다. 나는 친척들 중 고모와 닮았다는 얘기도 여러 번 들었고, 고모는 혼삿길이 막힐까 두려웠는지(!) 종종 '내가 쟤랑 뭐가 닮았냐.'라고 했다. 나에게 엽서를 써줬던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보따리에 있는 내 마음이 온전히 나에게만 있던 것이라서. 편한 마음으로 나는 동생의 속옷을 몇 개 구매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누어주는 것이 더 좋아진다.
경제관념이 부족한 내가 이렇게 선물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껴서 큰일이지만, 최소한 내가 받은 사랑만큼은 다시 그들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나만의 형태로 돌려주고 싶다.
+) 고모네 집을 나오며 할머니는 내게, 고모들은 그때를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애쓰지 말라고 했다. 할머니에게는 내가 막내딸 같은 존재이니, 고모들에게 마음 쓰는 것이 마치 애쓰는 듯이 보였나 보다. 물론 아닌 건 아니지만, 도리를 다 하고 싶다고 했다. '아쉬운 소리 듣는 게 싫어~'하고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사실 내가 10년이 넘게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얘기하면, 할머니가 꽤 슬퍼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