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문득 마흔 04화

차를 하도 많이 마셨더니......

급 인간 티백이 된 사연

by Snoopyholic
IMG_4713.jpg


일전에 모친과 목욕탕에 갔다가 생긴 일이다. 그날도 적절히 몸을 불린 뒤 집중해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있었다. 그런데 색깔이 조금 이상한 거라. 내 눈이 이상한가? 생각하며 보는데 녹회색의 왕때들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때밀이 수건이 연두색이다 보니 물이 묻어 나오는군, 결론을 내리는 순간 날아든 모친의 등짝 스매싱.

‘짝!!!’

정말 없던 애도 떨어뜨릴 법한 위력이었다. 내가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랩보다 빠르게 쏟아지던 모친의 말씀.

“어머! 이것 좀 봐라, 네가 하도 차를 많이 마시니까 때도 녹색으로 나오는 거 아니냐! 내가 작작 마시라고 했니, 안 했니?”

갑자기 웃음이 비집고 나와 나도 모르게 푸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옆 자리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냥 재미있었다. 왜냐면 그게 완벽하게 부정할 수만도 없는 말이었으니까.
요즘은 덜하지만 한때 차를 엄청 많이 마셔서 하루에 4-6리터 정도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병원에서 그렇게 마시면 안 된다고 하도 주의를 줘서 줄인 것이 2-3리터 정도다. 물을 그렇게 마시면 좋겠지만 그냥 물은 여름이 아닌 이상 기껏 마셔봐야 500밀리리터 정도밖에 안 마셔진다.
그리고 차를 많이 마신다고 계속 카페인을 그만큼 마시는 건 아니다. 내가 주로 마시는 잎 차의 특성상 한두 번 우리고 나면 카페인은 다 용출되고 나머지는 그냥 대개 향기와 색깔 성분을 마시는 셈이니 향과 색이 든 물을 마시는 것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라고 나는 믿어왔지만 말이다.
백차부터 흑차까지 각종 차를 섭렵하다 보니 그 성분이 내 몸을 구성하고 있을 것임은 의심할 나위 없을 테고 그게 때라는 형태로 벗겨진다 해도 안 이상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열탕에 몸을 담그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 만약 이보다 더 뜨거운 물에 몸을 충분히 오래 담그고 있으면 티백에서 차가 우러나오듯 내 몸에서 차가 우러날지도 모르겠다고. 내 몸이 티백이 되어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 또 웃겨서 혼자 낄낄.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혼자 뭘 그렇게 웃어?”

대답할까 하다가 또 괜히 잔소리 들을까봐 말았다.

“그냥…… 그나저나 엄마, 아까 정말 내가 차 마셔서 녹색 때가 나온다고 생각한 거야?”
“너도 참, 이태리타월이 녹색이니까 그렇게 됐겠지.”
“뭐야, 근데 왜 때렸어?”
“꼴 비기 싫어서 그랬다, 왜. 몸뚱이가 그게 뭐냐, 살이 뒤룩뒤룩 쪄서는! 살 좀 빼, 이것아!”
“때릴 핑계가 필요했다?”
“그래, 왜!”

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찌됐건 변변한 직장도 없이 프리랜서로 살며 빌빌거리고 결혼도 안 한, 애인조차 없는 과년한 딸은 노모 앞에서 유죄일 수밖에 없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바라본다. 내가 만약 40년 묵은 티백이라면 부디 세월과 함께 맛있어지는 보이차처럼 나로부터 우러나오는 차도 그렇게 깊고 근사한 맛이 나기를.


keyword
이전 03화YOLO라는 인생의 길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