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 4주 4천 마일
노스림으로 올라가는 길은 5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만 통행이 가능한데, 카이밥 고원(Kaibab Plateau)으로 들어서고부터는 검은 아스팔트 위에 싸락눈이 톡톡 튀고, 기온이 금세 섭씨 2도로 내려간다. 5월 하순에도 이 정도니 추운 계절에 통행을 제한하는 이유는 더 물을 게 없다.
어느샌가 싸락눈이 멈추고 가벼운 눈송이가 떨어져서 천천히 달리는데 갑자기 도로변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들이 있다. 살그머니 브레이크를 밟고 느릿느릿 후진하여 차에서 내려가 보니, 반가워도 꼬리 칠 줄 모르는 순한 사슴 가족이 낯선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서서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본다.
뜻밖에 만난 이 동물들이 언뜻 착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인정이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신기롭기도 하지만 말없이 반겨 주는 산주인들에게 불청객이 폐를 끼칠 것 같아,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서 있다가 모두 자리를 뜬 후에야 조심조심 좌우를 살피며 다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조금 가다 보니 카이밥 고원에 사는 짐승들에 대한 안내판에 퓨마의 사진이 있다. 그 아래 적힌 글에는 의외로 사슴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1905년에는 사슴의 수가 4천 마리였는데, 1924년에는 10만 마리로 증가했다. 20세기 초에 내려진 동물 보호조치로 사슴의 수렵이 금지되고, 사슴을 잡아먹는 퓨마나 늑대와 같은 포식동물들을 소탕한 결과였다. 그래서, 생명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을 것 같은 사슴들이 뜯어먹을 풀이 모자라서 많이 굶어 죽었단다.
인위적으로 귀여운 동물들을 보호하려고 험상궂은 사자나 늑대를 헤치면 생태계의 평형이 깨져서 착한 동물들도 못 사는 지옥이 된다. 이게 인간이 동물 귀엽다고 너무 편애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다. 하지만 나부터도 그게 안 된다. 숲에서 사슴들이 아니라 사자들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카이밥 고원의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달려가는 동안에 다시 하늘이 맑아져 마른풀들이 노랗게 덮인 평원이 시야를 밝힌다. 이제 길 끝까지 가기만 하면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의 북문인데, 문 양쪽에 나란히 서 있는 키 큰 소나무들도 길가의 사슴 가족처럼 우리를 반기며 어서 오라 한다.
아침에 자이언을 떠나서부터 중간에 쉬지도 않고 왔지만, 길에서 이미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랜드 캐니언 노스림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그랜드 캐니언 노스림의 안내판에는 해발 2400미터인 이곳이 캐니언 반대편에 있는 사우스림 보다 400미터가 더 높고 접근이 어렵단다. 그로 인해, 사우스림을 찾는 방문객의 10분의 1밖에 오지 않는 이곳의 경치가 사우스림보다 훨씬 더 빼어나단다.
전망대 주변 공기가 습하고 두꺼운 구름층이 하늘을 가려 계곡 안이 어둡다. 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에 시곗바늘이 돈다. 5분 10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이윽고 어두운 하늘에서 서서히 빛이 쏟아진다.
아직 하늘이 확 트이지는 않았지만, 엇갈린 구름 사이로 광선이 새어 나와, 도도한 그랜드 캐니언의 속 살을 파헤치니, 천 길 낭떠러지 아래 깊게 파인 골짜기의 윤곽이 드러나, 마치 거대한 천막이 줄지어 선 듯하다.
일찍이 높은 곳에 올라가, 만산이 겹쳐 물결치는 풍경을 본 적은 있으나, 태산 같은 첨봉들이 큰 뱀이 기어 다니는 골짜기에 발을 담고, 이렇게 우람하게 열 지어 늘어선 것은 처음이다.
Nunc dimittis! 누가복음에 나오는 시므온(Simeon)의 노래,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 메시아를 보았으니 이제 저 세상으로 떠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입가에 맴돈다. 볼 것을 보았으니, 이제 떠나게 하소서!
그랜드 캐니언을 한눈에 내다보고 나니 벌써 여행을 다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공원 로지(Lodge)에 가서 따뜻한 차 한 잔에 목을 녹인 후, 다시 카이밥 고원길을 달려간다.
이제 해가 기울고 있으니 동물들도 물가를 찾아 나오는 시간이라, 마른풀이 흩어진 카이밥 고원 여기저기에 잔바람이 물수제비를 뜨는 웅덩이로 물 마시러 나온 사슴들이 숲가에 모여서 한가히 풀을 뜯는다.
멀리서 평원을 바라보니 목가적인 풍경이 마치 상상인양 망막에서 그림이 되고 한 장씩 벗겨져 내 추억상자 속으로 들어간다. 훗날에 우리가 이곳을 지나던 일을 떠올릴 때면 상자가 열리고 다시 한 장면씩 그림이 나오겠지?
카이밥 고원을 지나 소나무가 조밀하게 박혀 있는 산림지대를 빠져나와 긴 비탈길을 따라 하산하며 멀리 평원을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붉은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지도상에 버밀리언 클리프(Vermilion Cliffs)이라고 적혀 있는 그 절벽이 끝나는 곳은 30마일, 페이지까지 가려면 거기에서 다리를 건너야 한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 절벽을 따라 가는데, 절벽이 끝날 듯하면 또 절벽이 나오고 뒤에 숨은 구름이 어둠을 몰고 온다. 이제는 절벽이 핏기를 잃고 누워있으니, 우리를 따라오던 차량이 갑자기 앞질러 나갈 때면, 시내도 아닌 한적한 길에서 경적이라도 한 번 울려 주고 가도 될 텐데, 급하게 달아나는 모습이 너무도 야속하다.
다행히 해가 다 지기 전에 협곡 사이에 걸쳐진 철교 가운데에 서서 다리의 난간을 꼭 잡고 아래로 고개를 숙이니, 멀리에서는 있는 것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던 푸른 콜로라도강이 캐니언 아래에 숨어서 고요히 흘러간다.
두꺼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해도 지는 듯하니, 밤이 오기 전에 얼른 페이지로 달려가야 한다.
페이지의 시내에 들어서자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간다. 점심도 못 먹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아무것도 먹지 못 한 우리의 빈 속을 채우기 위해... 다행히, 라이브 뮤직을 연주하는 분위기 좋은 식당이 영업 중이다.
우리도 카이밥 고원의 사슴들처럼 술 마시러 나온 손님들 옆에 앉아 풀을 뜯는다. 그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