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 4주 4천 마일
우리는 페이지(Page)에서 이틀 밤을 보내며 주변의 앤털로프 캐니언과 파월호수를 보았다. 앤털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은 페이지에서 10마일쯤 떨어진 인디언 영지 내에 있는 Upper Canyon과 Lower Canyon 두 곳인데, 우리는 접근이 좀 더 용이한 Upper Canyon을 목적지로 잡았다.
동굴처럼 생긴 이 캐니언을 1931년에 한 나바호 인디언의 어린 딸이 발견했다 하여, 여섯 살 소녀가 발견했다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캐니언 안에는 선사시대에 그려진 천장화는 없고, 단지 모래바람이 조각한 환상적인 암벽이 있을 뿐이다.
캐니언 안은 갈라진 암벽 사이에 생겨난 천장의 좁은 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만이 밝혀주는데, 그 틈이 겨우 2미터 정도로 좁아서,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는 정오가 캐니언 관람의 최적기이다.
우리는 정오 방문에 맞추어 나바호 인디언 영지 안에 있는 사파리 정류장으로 가서 인디언 가이드들이 이끄는 사파리 팀에 끼어 픽업에 올라탔다. 한 대에 열 명의 관광객들이 짐짝처럼 실려가며 차가 세차게 흔들릴 때마다 아우성을 쳐도, 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울퉁불퉁한 사막의 워시 위를 요동치며 달려간다.
십여 분 지나 차에서 내려 캐니언 입구에 도착하니, 차량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데, 뒤로 마치 바위산이 두 동강 난 듯 가늘게 벌어진 틈이 보인다.
가이드를 따라 캐니언 안으로 들어가니, 태양광이 천장의 좁은 틈으로 파고들어 와 미세한 먼지에 산란되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직선을 그으며 적갈색의 가는 모래 땅으로 떨어진다.
캐니언 안의 통로를 따라 걸으며 살펴보니 어디는 환하게 밝혀진 감색의 벽들이 어두운 갈색의 그늘진 암벽을 포옹하듯이 맞물고 있기도 하고, 또 어디는 양 벽이 고르게 밝아 백열등을 켜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캐니언의 길이가 겨우 200미터밖에 안 되지만, 잘록잘록 넓어졌다 좁아지는 것이 마치 핏빛이 엷게 비치는 창자 속 같은데 사진 찍을 곳이 너무 많다. 가이드가 앞서 가며 빨리 오라 재촉해도 모두들 게으름 피우며 천천히 걸어 나가니. 거의 반시간이 흘러 출구에 도착한다.
다시 가이드가 사람들을 모아서 방금 나온 캐니언 안으로 들어가란다. 픽업에 탈 때는 짐짝이었는데 이제 창자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니 뭐라고 해야 할까?
입구 쪽으로 되돌아 나갈 때는 안으로 들어올 때와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캐니언 안에서 찍은 사진들이 환상적이라, 사진동호회 회원들이 이곳에 수시로 몰려와 사진 찍는 바람에 사람들로 붐벼, 좁은 통로를 빨리 나가지 못하고 종종 기다리며 안을 살펴본다. 옛날에 나바호 인디언들이 비바람을 피해 쉬었다는 캐니언 안에는 넓은 방도 있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다. 정오가 지나면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아 너무 캄캄해서 그런가 보다.
정오의 태양이 하늘에서 쏘아대는 광선으로 밝혀진 캐니언 안에서는 빛의 조화가 환상처럼 펼쳐지는데, 눈으로 보는 그대로 내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게 아쉽다.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다시 화물차에 실려 워시 위를 달려가는데, 짐짝 열 명을 싣고 흔들거리며 질풍 같이 달려가던 차가 얼마 못 가 워시 위에서 기절을 한다. 정류장까지 걸어 나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차를 수리하고 있지만, 언제 끝날지 몰라서 탈출을 시도하려는데... 조수의 티셔츠에 있는 사진을 보니 왜지 겁이 난다. 백인을 많이 혼내준 인디언 영웅들의 사진이니까. 하지만, 한 순간 무서운 조수의 눈을 피해 민첩하게 탈출하여, 우리는 지나가는 차를 잡아 타고 공원을 빠져나간다.
탈출을 아무나 하나요? 조수가 차 밑에 들어가 있을 때, 우리 뒤를 따라 뒤늦게 탈출한 어떤 사람이 있다는데, 그 사람 결국 정류장까지 걸어 나갔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죽도록 고생한 끝에...
앤털로프 캐니언에서 파월호로 가는 길에는 콜로라도 강을 막아서 건설한 글렌 캐니언 댐(Glen Canyon Dam)이 있다. 안내판에 적힌 것을 읽어보니, 댐이 만들어진 후에 생긴 파월호(Lake Powell)는 땜 완공 후에도 호수에 물이 다 찰 때까지 17년이 걸렸다는데, 지금은 이 댐으로 인한 문제가 많다고 한다. 문제의 요점이 뭐냐 하면?
강물에 쓸려 하류로 흘러가야 할 흙이 댐에 갇혀서 바닥에 쌓이는데, 그 양이 하루에 덤프트럭 3만 대가 흙을 퍼부은 것과 같아서, 연간 1억 톤의 침전물이 쌓인다. 댐이 없었을 때는 흙이 콜로라도강을 따라 내려가서 유실되는 토양을 보충했는데, 이제는 콜로라도강이 흐르는 그랜드 캐니언에서도 모래사장이 줄어들었다. 더욱이, 계곡 아래로 흘러가던 강이 건조한 사막의 호수에 갇혀서 전보다 더 많은 수증기가 증발되어 사라지는데 그 수량 또한 엄청나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동력자원과 용수의 개발을 위해 섣불리 자연에 성형수술을 했다가는 두고두고 골치 아픈 일을 당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글렌 캐니언 댐에서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호수전망대(Scenic View) 벤치가 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넓게 펼쳐진 파월호의 경치를 조망한다. 푸른 물이 가득한 파월호에는 물에 빠져서 섬이 된 적갈색의 구릉들과 그 옆으로 배들이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항행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누가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다. 어떤 그림인지 생각하는 동안, 문득 누가 물을 보는 그림이 떠오른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바로 조선 시대의 문인화,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 바위에 기대어 물 구경하는 그림 속의 한 노인이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그 모습! 그게 지금 내 모습이 아닐까?
파월호 선착장에 내려가니, 마침 미국의 현충일이어서, 2차 대전 때 참전했던 늙은 용사들이 선착장에 나와 전쟁 기념사진들을 보이며, 자신들의 전과를 자랑한다. 태평양전쟁 중에 최전방의 인디언들은 일본군이 전혀 해독할 수 없는 나바호 언어로 본부와 교신을 하며 정찰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것을 나바호 코드(Navajo Code)라 부른다. 나바호 인디언들은 아직도 서로 간에 이 언어를 쓴단다.
호수를 나와서 페이지로 돌아가는 길에 댐을 다시 지나니, 저녁 햇살에 주변의 바위들이 붉게 물들어 풍경이 따뜻하다. 차를 세우고 댐을 다시 보려고 전망대로 내려가니, 작은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 사이에서 벌처럼 날갯짓하며 바쁘게 움직인다. 그 새를 쫓아다니며 셔터를 수십 번 누르니 벌새(Hummingbird)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 벌새는 꽃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사니까, 어딘가에 꽃도 있을 것 같다.
페이지를 나와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 림으로 가는 길에 콜로라도강이 말굽의 편자(Horseshoe)처럼 심하게 곡류를 그리며 돌아가는 호스슈 벤드(Horseshoe Bend)를 보러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책로 따라서 찾아 가는데, 멀리서 보니 붉은 암반이 움푹 파인 곳에 뭔가 있는 것 같다. 길 따라 더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보니 아직도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수직으로 파여 양안이 가파른 절벽 근처까지 가서 아래를 보니, 드디어 콜로라도강이 숨어서 뱀처럼 기어간다.
콜로라도강이 물길을 드러내는 그곳에서 아래를 들여다보는 것은 장관이지만 난간도 없는 절벽 위에 서서 사진을 찍으려니, 두 다리가 떨린다. 몸을 눕혀 아래도 제대로 못 보고 결국 사진 한 장 찍었는데, 전혀 말굽 모양이 아니다. 상체를 벼랑으로 조금 더 끌었더니, 이젠 손이 떨린다. 팔을 좀 더 길게 뻗어서 셔터를 열 번쯤 누르고 뒤로 기어 나와, 몸을 일으켜 사진을 확인하니, 우리가 와서 보았다는 증명사진은 될 것 같다.
다시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발 밑을 보니, 색깔이 고운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장미꽃 같지만 줄기가 아니라 몸에 가시가 돋쳐 있으니, 분명 선인장 꽃이다. 어제 벌새를 보고 꽃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바로 이 꽃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