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6
그랜드캐년의 사우스림(Grand Canyon South Rim - 남쪽 테두리)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는데, 중간에 리틀 콜로라도(Little Colorado)라는 작은 팻말이 땅에 박혀 있어서 따라 들어가니, 인디언이 관리하는 유료 주차장이다.
아직까지 여행 중에 한 번도 주차료를 내 본 적이 없지만, 굳이 내고 들어가서(인심도 좋지, 입장료는 공짜다) 콜로라도강을 찾아보니, 강은 보이지 않고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들만 즐비하다.
길에 팻말 박아 놓은 게 손님 끌어서 물건만 팔려고 한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 나오는데, 한 구석에 리틀 콜로라도라는 작은 표지판이 있다. 다가가서 아래를 보니, 물은 없지만 콜로라도강이 태고 적에 흘러가며 남긴 깊이 파인 강바닥이 보인다.
뭔가 속은 것 같아서 가게는 구경도 안 하고 나와 다시 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차창 밖을 보니, 땅이 갈라져 깊이 파인 자리가 구불구불 돌면서 서로 엉켜져 있다. 조금 전에 주차장 앞에 서 있던 팻말은 아무래도 인디언이 손님을 끌기 위해 여기서 빼다가 옮겨 놓은 게 틀림없다.
리틀 콜로라도에서 20분쯤 더 올라가니 큰 주차장에 그랜드캐년의 사우스림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고, 지도에 캐년의 테두리를 따라가며 경치를 볼 수 있는 전망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미 해가 많이 기울었으니 조바심이 일어 얼른 가까운 전망대로 걸어갔다. 산 그림자에 가려서 안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그랜드캐년의 노스림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넓게 트인 저녁 풍경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관광안내서에 저녁 해가 지는 순간의 경치가 절경이라 하여 경치가 빼어난 전망대에서 석양에 붉게 물들어 가는 바위산들을 보려고, 사우스림의 중간을 향해 30분쯤 달려가는데, 길가 숲 속에 동물이 있는 것 같다. 차를 세우고 다가가 보니, 뮬디어(Mule dire)라는 노새만큼 키 큰 노루가 나뭇잎을 뜯어먹다가 고개를 돌린다. 역시 경치에는 초목과 기암, 산과 강이 이루는 정적인 형상을 배경으로 동물의 동적 이미지가 묘사돼야 자연의 진미가 살아난다.
전망대에 차를 세우고 캐년 안을 조망하니, 저녁 태양에 금빛을 내던 산봉우리들이 기슭에서 올라오는 어둠을 물리치지 못하고 퇴색해 간다.
서산의 해가 땅에 닿을 무렵에는 계곡 깊숙한 곳에서 밝은 빛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데, 저녁노을이 캐년 안의 첨봉에 붉은 하늘 그림자를 내려놓는다.
해진 후에 금새 깜깜해진 길을 달려 그랜드캐년 빌리지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로 식당을 찾아 나가니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붐빈다. 하루 종일 빈 속에 먼 길을 헤매다가 훈훈한 곳에 앉으니 즐겁다.
헬리콥터를 타고 캐년 상공을 비행하기 위해 몇 달 전에 예약해 두었는데, 당일 기상조건이 나쁘면 비행이 취소되고, 안개나 구름이 끼어 있으면 올라가 봐도 볼 게 없어, 매일 일기 예보를 보면서 좋은 날씨만 기대했었다. 다행히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다.
아침 먹고 곧장 헬기장에 가서 수속하는데 카운터 앞에 있는 체중계에 몸무게부터 잰다. 이유는 다섯 명의 승객들 중에서 제일 가벼운 사람을 조종사 옆에 앉혀서 헬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조종사 옆 자리는 좌우 정면과 발 밑까지 시야가 확 트여 있기 때문에, 같은 값을 내고도 훨씬 우아하게 경치를 즐길 수 있고, 항공사진을 찍는데도 뒷좌석과는 비교가 안 되는 최상석이다.
우리가 몸무게를 재고 기다리니, 동승하실 분들이 남극의 펭귄처럼 카운터 앞으로 뒤뚱뒤뚱 걸어오시는데, 우와! 당연히 상석은 우리 마님 차지다.
헬기에 들어가 안전벨트를 매고 헤드폰을 착용하자 지상 요원의 수신호를 받고, 곧바로 카이밥 고원의 삼림 지대를 지나 캐년을 향해 날아갔다. 드디어, 발 밑에 노스림의 주변도로가 보이기 시작하니 오밀조밀한 소나무 숲 너머에서도 첨봉들이 어슴푸레 모습을 나타낸다.
캐년의 안쪽으로 날아 들어감에 따라 멀리에서는 수평선처럼 보이던 봉우리들이 점점 더 납작하게 보이고, 더 낮은 곳에서 몰래 흐르는 콜로라도강의 초록색 물줄기도 기어가는 뱀처럼 봉우리 뒤로 간간이 꼬리를 감춘다.
캐년 상공에서 헬기의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가는 동안 헤드폰에도 음악이 흘러나온다. 옛날에 익히 듣던 캔사스(Kansas)의 '더스트 인 더 윈드'다. "I close my eyes, only for a moment... All my dreams pass before my eyes...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잠시 눈을 감으니... 내 모든 꿈이 눈앞을 스쳐가고... 그 모두가 바람 속의 먼지이다."
계곡에서 눈을 떼어 잠시 하늘을 보니 빨간 헬리콥터가 고공에서 프로펠러만 돌리며 멈춰 서 있다. 순간 헬기로 굉음을 내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 자연파괴인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웅장한 그랜드캐년의 진면목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감동에, 생각도 일순간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랜드캐년을 상공에서 관망하고 헬기장에 돌아오니 꼭 한 시간이 지나갔다. 헬기에서 내린 후에는 캐년 주변 도로를 따라 차를 몰며, 지정된 여러 전망대에 간간이 내려서 그랜드캐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망대에서 풍경을 보는 것은 헬기에서 보던 것만큼 감동은 덜 해도, 기체의 진동과 반사광이 들어오는 헬기 창을 통해 몸을 구부려 가며 사진을 찍는 것보다 훨씬 여유 있게 경치를 감상하며 더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았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 전망대 몇 곳을 들렀는데 어느새 정오가 지나서, 곧장 그랜드캐년을 벗어나 남동부로 내려가니 매표소는 없지만, 자연보호지역인 우팥키 공원(Wupatki National Monument)이 나온다.
공원 안으로 계속 들어가는데, 수백 년 전에 인디언들이 버리고 가서 폐허로 남은 석조건물이 보인다. 서부극에서 인디언은 늘 천막에서 나오던데, 언제 이런 돌집에서 살았는지 놀라운 일이다.
우팥키 공원에서 다시 남쪽으로 더 내려가니, 온 산이 마치 화상을 입은 듯이 검은 화산재가 덮여 회색의 줄무늬를 두른 화산이 보여서 차를 세웠다. 팻말에는 썬셋 크래이터(Sunset Crater)라고 적혀있는데, 주변에는 열에 그을린 붉은 땅과 검은 화산재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산 아래쪽에는 마그마가 흐르다가 굳어서 생긴 검은색의 거칠고 긴 현무암의 암맥이 골짜기를 매우고 있다.
화산 남쪽으로 수십 마일 밖에 5만 년 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150배의 에너지를 가진 운석의 충돌로 생긴 메테오르 크래이터(Meteor Crater: 운석 분화구)가 있어서 더 내려가다가, 몇 마일 앞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달에 있는 분화구처럼 가장자리가 조금 올라간 웅덩이 같다. 그런데 막상 근처에 다가서니 분화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분화구안내소(Meteor Crater Visitor Center) 건물만 눈에 들어온다.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니까, 직원이 이제 마감 시간이라고 전망대부터 올라가 보란다. 분화구는 커다란 웅덩이인데, 테두리의 그림자가 안으로 길게 드리워서 중심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망원경을 꺼내서 자세히 보니, 60년대에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이 전지훈련을 하던 지점이 하얗게 표시되어 있다.
다시 건물 안에 들어가 보니 분화구 근처에서 수집한 거대한 운석의 파편이 전시되어 있는데, 무게가 650킬로그램인 운석은 이름처럼 돌이 아니라, 소혹성이 지구와 충돌한 후 고열에 녹아서 흩어진 철과 니켈의 합금 덩어리다.
분화구 관람을 마치고 나와 호텔을 찾아보니, 여행안내서에 수십 마일 밖에 윈슬로(Winslow)라는 작은 도시가 나와 있는데, 자동차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 시작될 무렵에 시카고와 로스엔절레스를 이어 주던 66번 국도가 통과했던 옛날의 향수가 어린 곳이라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이 찾아온단다.
윈슬로에 들어가는 길목에는 입구 전광판에 저렴한 방 값을 표시해 놓은 모텔이 많은데, 겉보기에 선뜻 들어갈 마음이 드는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당장 호텔은 잡지 못 하더라도 식당들이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늦기 전에 우선 저녁을 먹으려고 옛날부터 문을 연 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손님도 없고 주 메뉴가 기름지고 매운 멕시코 음식들뿐이다. 이미 시간이 늦어 주변 거리가 썰렁하고, 몸도 피곤한 데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어서, 배도 고프니 어쩌랴! 시들어 빠진 샐러드 뷔페나마 접시에 가득 담아 먹고 나서, 안되면 차에서 잘 요량으로 윈슬로를 포기하고 나가는데, 고속도로 진입로 근처에 깨끗한 호텔 건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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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랜드캐년 사우스림(+우팥키공원과 화산, 메테오르 크레이터, 윈슬로)
11.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을 향하여(+그랜드테튼 국립공원)
13. 쏠트레이크씨티(+그레이트쏠트레이크, 빙감캐년마인)
14. 브라이스캐년(+코다크롬배이슨, 라스베가스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