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국립공원 여행 - 4주 4천 마일
그랜드 캐니언의 사우스림(Grand Canyon South Rim)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는데, 중간에 리틀 콜로라도(Little Colorado)라는 작은 팻말이 땅에 박혀 있어서 따라 들어가니, 인디언이 관리하는 유료 주차장이다. 아직까지 여행 중에 한 번도 주차료를 내 본 적이 없지만, 입장료가 공짜라니 일단 주차비를 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강은 보이지 않고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들만 즐비하다.
길에 팻말 박아 놓은 게 손님 끌어서 물건만 팔려고 한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 나오는데, 한 구석에 리틀 콜로라도라는 작은 표지판이 있다. 다가가서 아래를 보니, 물은 없고 태고에 콜로라도강이 흘러가며 남긴 강바닥만 보인다.
뭔가 속은 것 같아서 가게는 구경도 안 하고 나와 차를 타고 경사로를 올라가면서 차창 밖을 보니, 땅이 갈라져 깊이 파인 자리가 구불구불 돌면서 서로 엉켜져 있다. 조금 전에 주차장 앞에 서 있던 팻말은 아무래도 인디언이 손님을 끌기 위해 여기서 빼다가 옮겨 놓은 게 아닐까?
리틀 콜로라도에서 20분쯤 더 올라가니 큰 주차장에 그랜드 캐니언의 사우스림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고, 지도에 캐니언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경치를 볼 수 있는 전망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미 해가 많이 기울었으니 얼른 가까운 전망대로 걸어가 아래를 보니, 계곡 안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그랜드 캐니언의 노스림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광활한 풍경이 펼쳐진다.
관광안내서에 저녁 해가 지는 순간의 경치가 절경이라 하여 경치가 빼어난 전망대에서 석양에 붉게 물들어 가는 바위산들을 보려고, 사우스림의 중앙을 향해 달려가는데, 길 옆에 동물이 있는 것 같다. 차를 세우고 다가가 보니, 뮬디어(Mule deer)라는 노새만큼 키 큰 사슴이 나뭇잎을 뜯어먹다가 고개를 돌린다. 역시 경치에는 초목과 기암, 산과 강이 이루는 정적인 형상을 배경으로 동물의 동적 이미지가 묘사돼야 자연의 진미가 살아난다.
전망대에 차를 세우고 캐니언 안을 조망하니, 저녁 태양에 금빛을 내던 산봉우리들이 기슭에서 올라오는 어둠을 물리치지 못하고 퇴색해 간다.
서산의 해가 땅에 닿을 무렵에는 계곡 깊숙한 곳에서 밝은 빛이 다 빠져나간 듯한데, 저녁노을이 캐니언 안의 첨봉들 위에 붉은 하늘 그림자를 내려놓는다.
우리는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 비행장이 있는 Tusayan을 향해 깜깜해진 산길을 달려 그랜드 캐니언 빌리지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바로 호텔 근처의 식당을 찾아 나선다. 밤거리에 사람은 다니지 않지만 식당 안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먼 길을 헤매다가 훈훈한 곳에 앉으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우리 마음속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헬리콥터를 타고 캐니언 상공을 비행하기 위해 우리는 몇 달 전에 표를 예약해 두었다. 그 후 당일 기상조건이 나쁘면 비행이 취소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일기 예보를 보면서 좋은 날씨만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침 하늘이 맑고 푸르다.
아침 먹고 곧장 헬기장에 가서 수속하는데 카운터 앞에 있는 체중계에 승객의 몸무게부터 잰다. 이유는 다섯 명의 승객들 중에서 제일 가벼운 사람을 조종사 옆에 앉혀서 헬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조종사 옆 자리는 좌우 정면과 발 밑까지 시야가 확 트여 있기 때문에, 같은 값을 내고도 훨씬 우아하게 경치를 즐길 수 있고, 항공사진을 찍는데도 뒷좌석과는 비교가 안 되는 최상석이다.
우리가 몸무게를 재고 기다리니, 동승하실 분들이 남극의 펭귄처럼 카운터 앞으로 뒤뚱뒤뚱 걸어오시는데... 우와! 당연히 상석은 우리 마님 차지다. 마님? 마님의 이름은 지엽, 이 순간을 위해 살 빼기에 전념했던 제 아내의 존칭이랍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앞으로 마님이 활약하는 장면들이 더 나올 거니까요.
헬기에 들어가 안전벨트를 매고 헤드폰을 착용하자, 지상 요원의 수신호를 받고 헬기기 이륙한다. 헬기는 굉음을 내며, 곧바로 카이밥 고원의 삼림 지대를 지나 캐니언을 향해 날아간다. 어느새, 발 밑에 노스림의 주변도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오밀조밀한 소나무 숲 너머에서도 첨봉들이 어슴푸레 모습을 나타낸다.
헬기가 캐니언 안쪽으로 날아 들어감에 따라 멀리에서는 수평선처럼 보이던 봉우리들이 정상이 드러나고, 더 낮은 곳에서 몰래 흐르는 콜로라도강의 초록색 물줄기도 기어가는 뱀처럼 산봉우리 뒤로 간간이 꼬리를 감춘다.
캐니언 상공에서 헬기의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가는 동안 헤드폰에도 음악이 흘러나온다. 옛날에 익히 듣던 캔자스(Kansas)의 '더스트 인 더 윈드'다. "I close my eyes, only for a moment... All my dreams pass before my eyes...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 잠시 눈을 감으니... 내 모든 꿈이 눈앞을 스쳐가고... 그 모두가 바람 속의 먼지이다."
계곡에서 눈을 떼어 잠시 하늘을 보니 빨간 헬리콥터가 고공에서 프로펠러만 돌리며 멈춰 서 있다. 순간 헬기로 굉음을 내며 소란을 피우는 것이 자연파괴인 것 같다. 하지만, 웅장한 그랜드 캐니언의 진면목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감동에 젖어, 순간의 생각도 일순간 바람 속의 먼지처럼 사라진다.
그랜드 캐니언을 상공에서 관망하고 헬기장에 돌아오니 꼭 한 시간이 지나갔다. 헬기에서 내린 후에 우리는 캐니언 주변 도로를 따라 차를 몰며, 지정된 여러 전망대에 내려서 그랜드 캐니언의 다른 모습들을 바라본다.
전망대에서 풍경을 보는 것은 헬기에서 보던 것만큼 감동은 덜 해도, 기체의 진동과 반사광이 들어오는 헬기 창을 통해 몸을 구부려 가며 사진을 찍는 것보다 훨씬 여유 있게 경치를 감상하며 더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좋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 전망대 몇 곳을 들렀는데 어느새 정오가 지났다. 우리는 서둘러 남동부로 내려간다. 우파키 공원(Wupatki National Monument)을 보기 위해서다.
공원 안으로 계속 들어가는데, 수백 년 전에 인디언들이 버리고 가서 폐허로 남은 석조건물이 보인다. 서부극에서 인디언은 늘 천막에서 나오던데, 언제 이런 돌집에서 살았을까?
우파키 공원에서 다시 남쪽으로 더 내려가니, 온 산이 마치 화상을 입은 듯이 검은 화산재가 덮여 회색의 줄무늬를 두른 화산이 보인다. 팻말에는 선셋 크레이터(Sunset Crater)라고 적혀있는데, 주변에는 열에 그을린 붉은 땅과 검은 화산재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화산 아래쪽에는 마그마가 흐르다가 굳어서 생긴 검은색의 거칠고 긴 현무암의 암맥이 골짜기를 메우고 있다.
화산 남쪽으로 수십 마일 밖에 5만 년 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150배의 에너지를 가진 운석의 충돌로 생긴 메테오르 크레이터(Meteor Crater: 운석 분화구)가 있다. 분화구 몇 마일 앞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달에 있는 분화구처럼 가장자리가 조금 올라간 웅덩이 같다. 그런데 막상 근처에 다가서니 분화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분화구안내소(Meteor Crater Visitor Center) 건물만 눈에 들어온다.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전망대로 올라가니 커다란 웅덩이가 보이는데, 테두리의 그림자가 안으로 길게 드리워서 분화구의 중심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망원경을 꺼내서 자세히 보니, 60년대에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이 전지훈련을 하던 지점이 하얗게 표시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분화구 근처에서 수집한 거대한 운석의 파편이 전시되어 있는데, 무게가 650킬로그램인 운석은 이름처럼 돌이 아니라, 소혹성이 지구와 충돌한 후 고열에 녹아서 흩어진 철과 니켈의 합금 덩어리다.
분화구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땅거미가 진다. 이제는 밤이 오기 전에 수십 마일 밖에 있는 윈슬로(Winslow)로 가야 한다. 옛날에 자동차 여행이 시작될 무렵에 시카고와 로스엔절레스를 이어 주었던 66번 국도가 통과했던 향수 어린 그곳에서 단 잠을 이루기 위해...
윈슬로에 들어가는 길목에 보니 입구 전광판에 저렴한 방 값을 표시해 놓은 모텔이 많다. 하지만, 겉보기에 선뜻 들어갈 마음이 드는 곳이 없다. 어쨌든, 당장 호텔은 잡지 못 하더라도 식당들이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늦기 전에 우선 저녁을 먹으려고 여행안내서가 추천하는 한 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손님도 없고 주 메뉴가 기름지고 매운 멕시코 음식들뿐이다. 이미 시간이 늦어 주변 거리가 썰렁하고, 몸도 피곤한 데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어서, 배도 고프니 어쩌랴! 시들어 빠진 샐러드 뷔페나마 접시에 가득 담아 먹고 나서, 안되면 차에서 잘 요량으로 윈슬로를 포기하고 나가는데, 고속도로 진입로 근처에 깨끗한 호텔 건물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