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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곧 Feb 06. 2024

연구자에게 시간의 자유란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어떤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안락했다.

 

우리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든 외부 요인으로 인해서든 종종 수렁에 빠진다. 일이 잘 안 풀리는데 방향성도, 빠져나올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 말이다. 그런데 내가 겪은 수렁과 주변 대학원생들이 빠지는 수렁을 생각해 보면, 연구자의 수렁에는 시간의 자유*가 한몫할 때가 많은 것 같다.

* 연구실마다 학교마다 정도가 다르지만, 연구자들은 회의, 실험, 강의 같은 일정이 없을 때는 시간 활용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오늘 오후에 논문을 읽을지, 논문을 쓸지, 실험을 할지, 발표 자료를 만들지 자기 선택이다. 옆 연구실 연구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다른 과 세미나를 들으러 가도 되고, 도서관에 가도 된다. 심지어 운동을 하러 가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나 강가에 앉아있어도 된다. 연구실에 아예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있다. 남들 일 할 땐 다른 것을 하다가 저녁 시간이나 주말, 휴가 중에 연구를 열심히 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시간의 자유가 수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문제를 무척 악화시키기는 한다. 나도 수렁에 꽤 깊이, 꽤 오래 빠져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시간의 자유가 문제를 악화시켰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발목 정도까지는 수렁에 담그고 있는 느낌이지만, 전엔 목까지 잠겨 있었던 것에 비교하면 많이 빠져나온 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수렁을 관찰하기에 좋은 때인 것도 같다. 너무 멀어져도 기억이 잘 안 날 테니까.


그래서 발목쯤까지 걸어 나온 지금, 수렁 자체도 좀 들여다보고 빠져나오려고 애썼던 이야기, 다시 굴러 떨어진 이야기, 또다시 애쓴 이야기도 한번 해보려고 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과, 어쩌면 또다시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질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대학원생과 연구자에게 시간의 자유가 왜 독이 될 수 있는가. 시간의 자유가 대학원생을 위기에 빠뜨리는 방식은 어느 정도는 연구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어서, 여러 대학원생이 이런 고생을 하게 되는 것에는 피하기 어려운 면도 있는 것 같다. 꼭 나처럼 이상한 일을 겪지 않더라도 말이다. 스스로도 조심하고 주변에서도 잘 도와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많이들 수렁에 빠지고 만다.


우선 연구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연구는 시행착오의 연속이며, 생각한 대로 결과가 나올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안 해봐도 미리 알 수 있는 거라면 애초에 연구를 왜 하겠는가.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은 연구의 본질이다.

결과를 아는 데에 오래 걸린다. 어떤 시도를 한지 몇 주, 몇 달, 몇 년 후에 알게 될 때도 있다. 몇 달에 걸쳐 실험을 했는데 무언가를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는 걸 결과를 보고서야 알게 됐다거나, 잘못한 것은 없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모은 실험 데이터에서 아무런 경향성도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거나 할 때도 있다. 

연구를 하다 보면 사람에게서 얻는 에너지가 적다. 각자가 다른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문이나 학회 등을 통해 내 연구를 세상과 소통할 기회는 1년에 두어 번 있을까 말까 하고, 대부분의 시간에는 연구의 자잘한 성과와 좌절은 나 혼자만 알고 있다. 


연구는 남들이 가지 않은 지식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게 연구의 좋은 점이자 어려운 점이다. 열심히 헤쳐 나간 길의 끝에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있고, 멀리 갔는데 중간에 길이 끊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남들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기만 했을 뿐인데 무언가를 얻게 되는 때도 있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은 매일의 노력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기 어렵고 자주 막막해진다. 


비슷한 조건의 비교군에 비해 대학원생의 정신 건강이 유의미하게 나쁜 것으로 보고하는 조사 결과가 여럿 있는데 ―예를 들어 우울증 위험도가 2-3배 높다거나― 막막함, 외로움, 매일의 연구에서 성과와 보람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 노력이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인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인생을 낭비하겠다며 대학원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연구의 막막함과 잦은 좌절에 시간 활용의 자유가 합쳐지면 무기력을 학습하기가 무척 쉽다고 생각한다.


연구의 본질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것이든 나처럼 이상한 일을 겪어서이든,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불안감이나 압박감 등이 커져서 견디기 어려워지면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 시청이나 무의미한 인터넷 서핑 등, 일시적으로 불안감에서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일들에 빠져든다. 잠깐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면 불편한 감정이 조금은 마비된다. 요즘은 특히 스마트폰이나 다른 전자 기기를 사용하기가 너무 쉬워서 이 과정이 더 쉽게 일어나는 것 같다. 사람들의 집중력을 빼앗아 대기업이 돈을 벌게 만들어진 플랫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동영상 시청처럼 확실한 딴짓까지는 아니더라도, 논문을 펼쳐는 뒀으나 전혀 집중해서 읽지 않는다거나, 괜히 코드를 썼다 지웠다 한다거나,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생산성 없는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여기에 높은 자유도를 끼얹어 보자. 누가 사사건건 시간을 관리하지 않으니 생각 없이 계속 시간을 흘려보낸다. 잠깐만 정신을 돌리려고 시작한 딴짓을 끊어낼 외부 요소가 부족한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하루쯤 연구를 안 해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하루가 다 가고 내일부터는 정말로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일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이런 날들이 쌓이다 보면 점점 마음이 더 불편해지고 불안감도 커진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불안한 사람은 생각의 힘이 필요한 일을 잘 못 하게 된다. 해둔 일이 없어 불안하고 불안해서 일을 더 못한다. 생각의 힘이 금방 떨어지니까 일을 간신히 시작했어도 집중력을 잃기 쉽고, 노력을 쏟고 싶어도 방향성을 모른다.


또 그 와중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지금까지 자기가 보낸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 스스로도 좀 못마땅하다. 그런 감정이 또 불편하기 때문에, 불편한 감정에서 잠깐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또 시간을 죽인다. 악순환의 고리다. 그것도 여러 개.

 



나는 어느 교수님께서 ‘지금까지 들어 본 대학원 이야기 중 가장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고 하셨을 만큼 이상한 상황을 겪고 박사과정 고년차에 연구실을 옮겼다. 이전 연구실에서 진행하던 연구에 대한 지적 재산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긴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공교로운 타이밍에 터져 갑자기 실험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학교 방침도 웬만하면 연구실에도 나오지 말고 재택근무를 하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상황에 재택근무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는 날이 많았고, 하루에 스마트폰을 12시간 이상 들여다보는 날도 많았다. 짧은 영상이나 소설을 많이 봤는데 사실 보고 나면 기분은 더 나빴다. 그리고 기분이 나빠서 더 봤다. 그러다 많이 지치면 겨우 잠들었고 그렇게 하루가 갔다.


생산성 없이 보낸 날들이 많아졌고 시간은 흘렀고, 그럴수록 더 수렁에 빠졌다. 언젠가부터는 어느 쪽이 원인이고 어느 쪽이 결과인지도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자주 생각했지만 그만둘 의지도 없었다. 벗어나도 불행할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을 보낼수록 마음의 힘은 더 깎여 나갔고,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사실 어떤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안락했다. 


어떤 날에는 문득 그런 상태에서 다소 벗어날 때도 있었지만 곧 다시 돌아갔다. 그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어떤 복원력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처럼. 내가 수렁에 빠져있었고 수렁에서 빠져나오려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꽤 오래 걸려 배웠다. 무기력에 빠져 있다 보면 무기력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안 들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생활이 수렁에 빠졌을 때 헤어 나오는 방법은, 진부하고도 역설적이게도 하루하루 차곡차곡 노력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여기서 문제는 '하루하루 차곡차곡 노력하기'가 실행하기 아주 어렵다는 것인데, 나도 마음먹었다고 마법처럼 단숨에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러 방법을 시도했고 여러 번 다시 넘어졌는데, 장기적으로는 발전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여러 시도들과 실패에 대해 앞으로 더 쓸 예정이지만, 지금 먼저 떠오르는 것 몇 가지만 짧게 써본다.


1. 고통스러운 상황에 스스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불행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학위도 성도 나 자신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끝내 나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맞서 싸우든,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가든, 스스로를 괴로움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


2. 지킬 수 있는 작은 원칙을 세우고 최대한 지킨다. 하루하루 무엇이라도 하는 것의 힘을 믿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는 다르다. 졸업을 앞두고 한동안 나는 적어도 평일에는 매일 연구실에 가겠다는 원칙을 지켰다. 가서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3. 도움과 조언을 구한다. 지도 교수님, 옆 연구실 교수님, 연구실 동료, 학교 학생 센터, 상담사 선생님, 친구나 가족 등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도 좋다. 그들이 내 연구를 해줄 수는 없지만, 무기력의 늪에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의외로 사람들은 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4. 흘러간 시간을 받아들인다. 연차는 쌓였는데 연구 실적이 없다. 무척 심란한 문제지만, 아니 뭐, 그런데, 자꾸 생각해서 뭘 어쩌겠는가? 그걸 돌아보는 게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것이고 우리는 오늘만 살아갈 수 있다. 적어도 후회에 소모할 시간과 에너지라도 아껴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에서, 실패에 가까운 것이더라도 무언가를 건져보려 시도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결국 실험은 못 했더라도 장비 개발에 대한 논문을 쓴다거나,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결과라도 그대로 발표해 본다거나. 모두가 성공적인 결과만 보고하고, 예상과 다른 결과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감춘다는 것도 과학계의 문제 중 하나다.


5. 구조적인 문제를 인지한다. 내 생각엔 대학원생 고통의 외부적 책임은 첫째, 지도 교수에게 있고, 둘째, 학과와 대학에 있으며, 셋째, 학계와 사회 전체에도 있다. 대학원은 권력이 비정상적일 만큼 불균형한 곳이다.

내가 초래한 일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내 몫의 노력을 해야 하는 거지만 ―내가 이걸 좀 못 했다― 내 고통에 기여한 것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알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대해야 한다.


우울한 사람은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던데, 구조적인 문제를 바라볼 때는 어쨌든 고개를 들고 시야를 넓히게 되는 것 같다. 분노든 연대감이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뜻을 세우든, 나 자신의 고통만 내려다보고 있지 않고 고개를 드는 것에 의미가 있다.


6.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절박한 마음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고 해서 스스로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 몸과 마음은 애초에 그렇게 작동하는 게 아니다. 현실적인 기대를 하고 대처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다시 넘어질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잠깐 실망했다고 모든 것을 망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다음 편부터는 내가 스스로를 수렁에서 건져내는 데에 유용했던 몇 가지 방법과 경험을 소개해 보려 한다. 하루 12시간 넘게 했던 스마트폰 중독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어떻게 졸업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는지, 겨우 빠져나온 것 같은 수렁에 다시 빠져들려 할 때는 어떻게 했는지 써볼 예정이다.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는 편이 좋았겠지만 아무튼 겪었으니 의미 부여를 해보자면, 크게 보면 사는 일도 연구와 비슷해서 이런 경험이 나중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 같다. 내 연구는 나만 가본 길인 것처럼 내 인생도 나만 가본 길이기 때문이다. 연구나 인생이나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알기 어렵고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과 실망이 가득하지만, 성실하게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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