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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곧 Aug 20. 2024

고생 끝에 낙은 오는가

(딱히…….)


그래서 고난 끝에 결국 박사 학위를 마치게 되었으니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을까? 내가 내 이야기의 독자라면 이쯤에서 글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거라고 예측할 것 같다. 나도 이 이야기가 여기쯤에서 단순하게 마무리되면 좋겠다. 하지만 인생은 작품과는 달라서 완결성도 짜임새도 없는 모양이다.


박사 디펜스 이후에도 나의 마음속에는 주화입마가 계속 오락가락했다. 어떤 때는 몹시도 희망차고 밝은 기분을 느꼈으나 어떤 때는 후회와 절망감, 외로움, 허무감 같은 어두운 감정이 밀려왔다. 마음을 돌보는 방법을 좀 깨달은 줄 알았는데 며칠 지나면 다시 괴롭고, 길고 어두웠던 터널의 끝에 도달했는가 하면 어느새 다시 암흑 속이었다. 발이 닿지 않는 어두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줄곧 들었다.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계속 쓰는 것이 나에게도 힘든 면이 있지만 재활일지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으니 그냥 써본다. 이번 글은 박사 디펜스 후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그리고 돌아온 후 초반의 이야기다.  




디펜스 후 일주일. 홀가분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했다. 힘이 빠질 것을 예측했기 때문에 디펜스 전에 이것저것 계획하고 예약해 둔 것들이 있었는데 그걸 실행했다. 지역 축제의 일부였던 짧은 달리기 대회에 나갔고, 혼자 자전거를 버스에 싣고 나가 하루 동안 150km를 탔고, 처음으로 헌혈도 했다.


디펜스 후 2주. 근처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왔다. 발표도 만족스럽게 했고 사람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즐거웠다. 이 학회는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전 방문 연구원이었던 시절, 그곳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갔던 학회였다. 마침 학회 장소까지 같았다.


그때와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하면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나는 박사(진)가 되었고 여러 좋은 경험과 아픈 경험을 했다. 배운 것이 많고 할 줄 알게 된 것도 많지만 어쩐지 자신감은 줄어든 느낌이다. 일곱 살이 늘었다. 이전에는 학회나 모임 등에서 대개 내가 어린 편이었는데 이제는 꼭 그렇지는 않다. 그 사이 나는 어떤 면에서는 더 단단해졌고 어떤 면에서는 더 유연해졌으나, 어떤 면에서는 다소 손상되고 찌그러졌다고 느낀다.


디펜스 후 2주 하고 며칠. 부모님이 한국에서 나를 방문하셨다. 함께 여행도 했고 그동안 나의 생활이 어떤 식이었는지도 얕게나마 공유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내 출퇴근 길을 자전거를 타고 함께하기도 했다.


학교에 갈 땐 주로 저쪽 길로 다녔는데 마음이 심란한 날엔 이쪽 길로 돌아서 다니기도 했어요. 10분 정도 더 걸리지만 이쪽 길이 더 조용하고 풍경도 멋지거든요. 가을에는 저 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지요. 여름 저녁에 이 길로 퇴근을 할 때면 자전거를 타고 모퉁이를 돌아 숲 속으로 들어설 때에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이 피부에 확연히 느껴지곤 했어요. 학교에 가다가 여기서 사슴을 본 날도 있었지요……. 강가를 따라 달리다가 비버를 본 날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요.


부모님은 모르셨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어떤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분들이 내게 용서받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 혼자 그렇게 했다.


디펜스 후 한 달. 부모님과 여행 중 어느 호텔 방에서 학위논문을 최종 제출했다. 디펜스가 갑자기 잡히고 급하게 논문을 써내느라 오타와 비문이 많았다. 오죽하면 심사위원 여러 명이 심사 의견으로 오타를 고치라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다. 읽어 보니 오타가 정말 많아서 민망했다. 논문을 제출하고 나면 더는 수정도 안 되고 끝이라는데 너무 기분이 이상했다. 망설여졌지만 자꾸 들여다본다고 뭐가 아주 나아질 것도 아니기에 그냥 제출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때 오타를 꽤 열심히 고쳤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이전 연구실 지도교수 이름을 딱 두 번 언급하면서 그 와중에 오타를 내놓았다. 그 오타는 한참 후에야 친구가 알려줘서 알았다.

이전 연구실 지도교수는 내 연구실 이동을 막기 위해 여러 위협과 회유를 시도했었는데, 그의 근거는 자신의 지도에 대해 정당한 인정credit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자신의 지도 실적으로 언급할 수 있도록 학교가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나는 그 주장에 대해 이런 요지의 답변을 써서 보냈다.

‘연구자의 실적은 객관적 사실과 학자로서의 양심에 비추어 쓰는 것이지 학교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적을 사실에 맞게 쓴다면 학교의 보장이 필요 없고, 사실이 아니라면 학교의 보장과는 상관없이 써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XXXX 박사가 나를 ‘특정 기간 동안 지도 교수로서 지도했다’라고 쓴다면 사실이고, 그가 나를 ‘박사 졸업생으로 배출했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 학위 논문에 이전 지도 교수의 지도 실적은 이런 식으로 언급되었다.

“이 학위 논문 챕터 2에 수록된 연구는 저자가 XXzX 박사의 연구실 학생일 때 수행한 것입니다.”

깔끔하게 적확한 묘사였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이름에 오타를 낸 것은 의도는 아니었지만, 알게 되었을 땐 왠지 적절한 것 같아서 한참을 웃었다.



디펜스 후 한 달 반. 부모님이 내 짐을 많이 챙겨서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부모님의 방문은 좋으면서도 불편했는데 혼자 남으니까 또 좀 서글펐다. (사람 마음이 참…….)


박사과정 후반에 너무 힘들 때는 제발 누가 나를 좀 챙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식사는 했는지 잠은 자는지 하루종일 울지는 않는지 누가 좀 들여다보고 보듬어 주면 좋겠다고 말이다. 부모님의 방문은 그런 방면의 외로움을 조금 채워주는 데가 있었지만, 곁에 누가 있어도 결국 내 괴로움은 내 것이라는 — 심지어 좀 숨겨야 한다는 — 느낌을 받는 일도 많아서 또 다른 방식으로 괴롭기도 했다.


오래 혼자 지내다가 내 공간에 누가 있는 것 자체도 좀 불편했고, 여행 계획을 내가 다 세우고 어떤 때는 누군가와 영어로 싸워가며 문제를 해결하고 하는 것도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었다.


다른 무엇보다 오래 지내던 곳을 떠나가면서 거쳐야 할 애도의 시간을 침범당한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죄송하고 배부른 투정이지만 그런 면도 있었다.


디펜스 후 두 달. 집을 비워야 했다.


그동안 짐을 정리한다고 했는데도 마지막엔 이사 일정에 맞춰 모든 것을 정리하기가 버거웠다. 고맙게도 친구들이 자선 단체에 기부할 물건과 버려야 할 물건 등을 잔뜩 떠맡아 주어 이사 일정을 겨우 맞출 수 있었다. 그마저도 몇 시간 남기고 친구들이 달려와서 같이 집을 뒤집어엎어주지 않았더라면 시간을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떠날 곳이었으므로깊이 정을 주지 않고 최대한 가볍게 산다고 살았지만, 하찮고 사소하고 어여쁜 것들이 몇 생겼더랬다. 몇몇은 나눠주거나 기부했고 어느 정도는 나와 함께 한국에 왔지만, 많은 것들이 마지막에 정신없이 쓸려나갔다. 지금도 사실 그 와중에 아주 소중하고 여린 무언가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쿵 내려앉는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애초에 가지고 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집 창밖에 바로 내다 보이던 키 큰 자작나무 가지 같은 것들 말이다. 겨울눈이 눈에 덮인 채 추운 날들을 나고 봄마다 새순이 돋고 여름 바람에 초록이 휘몰아치던,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밤 새 흰 가지 위로 눈이 쌓이던 자작나무 가지와는 아마도 영영 헤어진 것이리라.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들과 좀 더 성실하게 마무리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좀 섭섭해하셨을지언정 조금 더 일찍 한국에 가시는 쪽으로 일정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테고, 월세와 비행기 표 값을 좀 더 지불하더라도 며칠이나 몇 주 정도는 더 머물 수도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혼자서 남아 있었던 기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복잡해서 그랬는지 나는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혼자 남아 있던 시간에 나는 많이 울었고 아무것도 못 하고 보낸 시간도 꽤 많았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맛보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게 또 너무 감정적으로 지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마음만큼 다 해내지는 못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겨우, 조금은 거친 방식으로 이별이었다.


디펜스 후 두 달 하고 하루. 한국에 돌아왔다.


지내던 곳에는 벌써 눈이 많이 왔었는데 한국에 오니 다시 가을이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1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 들르곤 했지만 그렇게 잠깐 방문할 때와는 좀 다른 기분이었다. 아주 많은 것들이 새삼스러웠다.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한 건 아니지만 문득 내 옷차림이 좀 창피한 것 같아서 불편하고 예쁜 옷을 사 입었다. 다들 코트 입고 다니는데 나만 고어텍스 등산복 재킷 차림이었달까. 새로 산 옷을 입고서 오래 만나지 못했던 여러 친구들과도 만나고 대학 모교에도 다녀왔다.


지내다 보면 문득문득, 내가 외국인이 아니라는 게 이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소수자인 외국인으로 있는 것이 익숙했는데 갑자기 우리나라에 자국민으로 있다는 게 어색했다.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해석이 되어 버리는 나의 모국어가 지하철을 탈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공원에 앉아 있을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다. 버스를 타면 앞 좌석에 붙은 광고가 한글로 되어 있었다. 갑자기 세상이 너무 소란스럽고 번잡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나에게 한국인이 맞느냐, 외국에서 온 것 같다 하는 일도 몇 번 있었다. 나는 저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는데 이젠 완전 한국인도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군, 하고 잠깐 생각했다가, 사실은 모두가 제 나름인 것이지, 하고 말았다.


디펜스 후 두 달 반. 졸업식이었다. 이미 귀국하기도 했고 학위복도 너무 못생겼고 그다지 갈 마음도 없어서 참석하지 않았다. 학위증은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학위 수여식이 별 거냐고 괜히 냉소적으로 굴었던 것도 내가 거친 방식으로 하고 만 이별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디펜스 후 세 달. 이력서를 쓰고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주 난데없이, 아무나 적당한 녀석을 붙잡아 결혼해서 빨리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혹은 그래야 하는데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양상의 주화입마가 시작된 것이다.



너무 갑자기 새로운 나라로 오게 되어 한동안 연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한동안은 연재 주기가 불안정할 수 있지만 다시 노력해 보겠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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