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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곧 Jul 02. 2024

박사 디펜스 후에

피자를 사주고 피자를 챙겨주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내 자전거도)


"네 디펜스 질의응답 때 앉아있을까, 나갈까?"


연구실을 옮기고 딱 한 명 생긴 랩메이트 K가 박사 디펜스(학위 심사)를 앞둔 나에게 물었다. 발표 후에 이어지는 심사위원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굳이 남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가 함께 있어 주길 바라는 사람도 있기에 물어본다는 것이었다.


"너 그거 아니?"


나는 몹시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뭘?"

"질의응답도 끝나고 나면 발표자랑 참관인들을 다 쫓아내고 심사위원들끼리 최종 결과 회의를 하거든?"

"응."

"그때 함께 쫓겨나서 불안해하는 발표자를 달래주며 같이 기다려주는 것이 랩메이트의 역할이란다."


나는 한국에 있는 선배의 발표를 해외에서 지켜보다가 함께 복도로 쫓겨난 적도 있었다. 내가 화상 회의로 접속 중이었던 노트북을 후배가 들고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었지만 꽤 물리적인 방식으로 함께 쫓겨나서 불안해하는 발표자 선배를 달래주었다. 아무튼 K에게 주장했다.


"그리고 말이지? 그러고 기다리다 보면 심사위원이 문을 딱 열고 그럴 거거든? X 박사, 들어오라고. 그게 바로 박사라고 처음 불려보는 순간인 거지. 그렇다면 랩메이트의 역할은 뭐겠어? 그 순간을 목격해 주는 것이다."


K는 낄낄 웃더니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디펜스 당일에 약속대로 내 질의응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나와 함께 쫓겨나 주었다.


오프라인으로 참석한 다른 친구들은 발표만 듣고 갔고, 온라인으로 참석한 참가자들은 상황상 접속을 종료해야 해서 나와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K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문이 열렸다.




"Congratulations, Dr. X!"

X 박사, 축하합니다!


디펜스 심사위원장 교수님이 문을 열고 나에게 악수를 청했을 때, 나는 K에게 눈짓했다.


봤지?

끄덕.



디펜스 후 교수님이 사주신 피자

디펜스를 잘 마치고 지도 교수님과 K와 함께 근처 식당에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교수님이 피자에 맥주를 사주셨다.  


글쎄, 디펜스를 하던 동안과 그때까지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발표도 만족스러웠고 심사위원 교수님들과도 좋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분야 교수님들에게서 다양한 각도에서 질문을 듣는 것도 좋았고, 내가 그들과 편안하게 소통하면서 재밌는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연구자로서 성장했다는 것도 스스로 느낄 수 있어서 뿌듯했다. 시차가 꽤 나는데도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내 발표를 지켜봐 준 친구들에게도 고마웠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끝이라고? 박사가 이렇게 끝난단 말이야?


디펜스를 마치고 지도교수 B 교수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잘 끝나서 좋기는 한데, 이상하게 좀 허무한 것 같아요."

교수님이 대답했다.

"보통 그렇단다."


우리는 피자에 맥주를 마시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헤어졌다. 아직 이른 오후였다. 교수님이 남은 피자를 포장해서 내게 주셨다. 나에게 필요할 거라면서.




이후로 한동안 사람들에게 이 알 수 없는 허무감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럴 만도 하니 잘 쉬라는 것이었다.


다른 대학에 계시는 공동 지도교수 S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디펜스하고 나면 많이들 그래. 무언가 열심히 한 후에 막상 끝을 보고 나면 갑자기 방향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야. 들인 노력에 비해 그것을 보여줄 시간이 짧을 때 특히 더 그런 것 같아. 예를 들어 단거리 육상 선수는 4년을 노력해서 몇 초짜리 달리기를 하게 되잖아. 그런 종류의 일을 하고 나면 그럴 때가 있어. 박사도 몇 년이 걸리는데 50분 남짓한 발표 동안 보여줄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니까 더 허무할 수 있어."


나의 헬스 트레이너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디펜스를 마친 나에게 타코와 마가리타를 사주었다.)


디펜스 후 트레이너가 사준 타코와 마가리타


"야, 너 그동안 노력한 게 얼만데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운동선수들도 많이들 그런다. 큰 대회 끝나고 나면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거야. 너도 몇 년을 연구하고 노력하고, 논문 쓰고 발표 준비 하고 달려왔는데 순식간에 목표 지점이 없어진 것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냥 좀 쉬고 그래."




그런가, 그런 것도 같아. 그렇지, 좀 쉴 때도 된 거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됐던 것 같다. 그들이 나의 정말 어두웠던 시간과 어두웠던 마음을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올림픽 참가 같이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고, 정말로 치열하게 달려온 것도 아닌데 이렇게 허무감을 느낄 일인가? 박사 학위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나는 그동안 무기력하고 우울하다며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지 않나. 하루 종일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집 밖으로도 못 나오고 산책도 겨우 할까 말까 했던 날들이,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시간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열심히 한 후에 겪는 허무감이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아직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글로 풀어쓰다 보니 이제는 그때의 내 마음이 좀 가엾다. 어려움을 나름대로 견디고 이겨낸 스스로에게 내가 너무 가혹할 때가 많았다는 게 느껴진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려울 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는 건 마음 아픈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했다는 건 의미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도리어 그렇게 보냈던 지난 시간을 근거로 내게는 허무감을 느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글로 써보니 이제야 이런 여러 마음이 보인다.




아무튼 다시 디펜스 날로 돌아와서. 교수님이 사주신 피자로 점심 식사를 하고 랩에 돌아와 축 늘어져 있는데 랩메이트 K가 차로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고맙지만 괜찮아. 나 아침에 자전거 타고 와서 타고 가야 돼. 좀 쉬다 집에 갈게."

"진짜? 괜찮겠어?"

"아마도?"


K한테 미안하기도 했고 자전거도 고민이었지만 사실은 심적으로 피곤해서 아무 선택을 못 하는 상태에 가까웠던 것도 같다. 그러고 계속 늘어져 있었는데 K 눈에 아무래도 내 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K가 재차 권했다.


"그냥 나 갈 때 가는 게 어때? 생각해 봐. 오늘은 일단 집에 가고 자전거는 내일 버스 타고 와서 찾아도 되잖아. 그러고 있는 널 그냥 두고 집에 가기 마음 쓰여서 그래."

"아니야 괜찮아. 쉬다 보면 정신이 들 것 같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러고 몇 시간이고 늘어져 있을 내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무도 없는 랩에 덩그러니.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수렁에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 가지 않고 나를 살피고 있던 K에게 슬그머니 말했다.


"나 근데 들를 곳도 있는데."

"내가 태워다 줄게."

"네 차에 내 자전거 실을 수 있는지 한번 봐도 돼? 보고 안 되겠으면 그냥 두고 가도 괜찮아."

"물론이지. 실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


K는 내 볼일이 있었던 곳을 거쳐 나를 집 앞에 내려주었다. 자전거도.


고맙다고 여러 번 인사하고 헤어졌다. 텅 빈 집에 도착하자 안심이 되면서도 허무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일단 드러누워서 아무것도 안 했다. 아침 일찍 나서서 디펜스를 하고 돌아온 거라는 게 별로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내가 이제 박사 ―정확히는 박사(진)― 라는 실감은 더더욱 안 났다.


계속 에너지가 없어서 저녁에는 점심 때 남은 피자를 데워 먹었다. 냉동해 뒀다가 다음 날에도 먹었다. 그리고 남은 피자가 나에게 필요할 거라며 챙겨주신 교수님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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