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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곧 Jun 25. 2024

박사 디펜스와 학위의 본래 의미는

냉소와 환멸에도 불구하고


모른다고 해도 된다는 걸 기억해.

박사 디펜스를 앞두고 조언을 구하는 내게 지도교수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다.  


“심사위원의 질문을 시험이라고 생각해서거나, 혹은 모른다고 말하기 부끄러워서일 수도 있겠지만 디펜스 질의응답 때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아. 하지만 괜히 아는 것처럼 대답하다가 더 꼬이는 일이 많지. 네 생각은 밝히되,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편이 좋아.”


나는 가볍게 답했다.


“오, 나 모른다고 인정하는 거 잘해!”


교수님은 피식 웃었다.


“그런 것 같더라. (…… 예?) 그래서 별로 걱정은 안 해. 아무튼 기억해 두렴. 그들이 너를 곤란하게 하려고 네가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가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섞여 있는 것은, 디펜스 심사위원이 하는 일 중 하나가  연구의 경계선을 그리는 일이기 때문이야. 네가 어디까지를 했고 그 지식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고, 어느 것은 포함하지 않는지 더듬어나가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지."




선배 과학자들과 함께 내가 세상에 기여한 지식의 경계선을 더듬어나가는 과정이 박사 디펜스라니. 아름다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런 꼬인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속 편하게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


대학원과 학계가 그렇게 올곧고 합리적이고 서로를 환대하는 곳이라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했겠는가?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학생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는 말씀에도 반감이 들었다. 훌륭한 교수님들이 많겠지만, 내가 여러 디펜스를 지켜보았을 때 못난 모습을 보이는 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이 괜히 아는 척을 하려고 하거나, 학생을 (또는 좀 더 나쁘게는 학생의 지도교수를) 괴롭히겠다고 질문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수님 이야기가 현실성 떨어지는 이상론 같이 들렸다.  


그리고 교수님의 조언에 이런 꼬인 생각이 든 데 대하여 약간의 부끄러움과 억울함, 그리고 희미한 슬픔과 외로움 같은 것을 느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학사는 이제 자기 분야에 대해 뭔가 꽤 잘 알게 된 것 같다고 느끼고,

석사는 자기가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박사는 이건 남들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 단계라고.


내 생각엔 아주 아주 깊이 들어간 세부 분야의 조그만 한 주제 ― 본인의 박사 연구 주제 ― 에 대해서는 남들도 다 모르고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나마 내가 제일 잘 안다고 느낀다면 훌륭한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그림 출처 Matthew Might, "The illustrated guide to a Ph.D." http://matt.might.net/articles/phd-school-in-pictures/, openculture.com에서 재인용)


인류 지식의 경계선을 원으로 표시했다고 해보자 (다음 그림의 맨 윗줄 왼쪽). 초등, 중등, 고등학교 교육을 거친 사람은 이 지식의 경계선 안쪽에서 알고 있는 범위를 전반적으로 넓혀간다 (맨 윗줄 가운데 두 그림). 학부에서 전공 공부를 한다는 것은 거기서 한 방향으로 내 지식을 확장해 나가는 것에 해당한다 (윗줄 오른쪽). 그러나 인류 지식의 외연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박사 학위를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인류 지식의 가장자리에 솟아난 조그만 점 같은 것


대학원에서 여러 논문을 읽으며 전문 분야의 지식을 확장해 나가다 보면 비로소 아주 좁은 범위에서나마 지식의 가장자리까지 가닿고 (가운뎃줄 왼쪽에서 두 번째), 더 나아가 한 점에 집중하여 가장자리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가운뎃줄 맨 오른쪽). 그러나 지식의 가장자리는 쉽게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몇 년에 걸쳐 밀고 미는 과정이 박사과정인데, 어느 날 가장자리가 살짝 밀려나고, 지식의 원이 아주 조금 튀어나간다 (아랫줄 왼쪽). 이 인류 지식의 가장자리에 난 뾰루지 같은 것을 박사 학위라고 부른다.


(원작자는 dent(살짝 난 흠)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반 농담으로 뾰루지라고 해봤다. 자고 일어나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지 않은가? 아무튼 원작자는 이렇게 끝낸다. 당신이 밀어낸 만큼 당신에게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아랫줄 세 번째). 그러나 큰 그림을 기억하라 (아랫줄 오른쪽). 계속 밀어내라.)




인류 지식의 경계선에 난 작디작은 뾰루지라느니 하는 거창하면서도 하찮은 이야기를 왜 썼느냐면, 그게 현실에 치인 대학원생들이 잃어버리는 어떤 낭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겠다는 목표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지식의 가장자리를 밀어내는 지난한 몇 년 동안 냉소를 배우기 쉽다. 내 생각에는 자기 연구에 대한 비판, 여러 부조리에 대한 억울함, 무기력, 우울, 불안, 환멸, 방어기제, 피해의식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섞여서 냉소로 변하는 것 같다.


여기서 냉소란 이를테면,


내가 하는 연구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내가 세금을 축내고 있어!
원래 대학원생은 교수님 발닦개일 뿐이고 학계 착취 구조의 희생양이지.  
내 친구는 현명해서 대학원 안 가고 취직해서 잘 살고 있는데 내가 멍청했다.  
논문이나 최종 발표나 적당히 하고 어서 졸업이나 해야지. 어차피 누가 신경 쓴다고.


이런 식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스스로 객관적이고 현실적이고 노련하다고 여긴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왕왕 해왔고, 또한 이 모든 자조에 얼마쯤 (어쩌면 꽤 많은) 진실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는 것과, 냉소적인 태도를 두르고 자신의 선택, 노력, 시간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기력과 우울에 오래 잠겨 있다 보니 알겠다. 냉소는 쉽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옹호하는 일은 어렵다. 다 안다는 듯 냉소적인 태도를 두르고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이 애를 쓰고 진심을 쏟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고 쾌적하다. 마음을 다칠 일도 실망할 일도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어느 순간 어떤 반짝이는 의미도 내 안에 남아있지 않게 된다. 취약한 상태에 놓일 것을 받아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있는 모양이다. 살면서 많은 중요한 것들이 그렇듯이.




내가 밀어낸 인류 지식의 가장자리가 얼마나 티끌 같이 작든, 그 티끌마저 곧 바람에 날려가 버리든 말든, 학자들이 다 선한 의도로 지식과 서로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들, 나는 내 연구를 존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작디작은 부분이나마 지식의 가장자리에 가닿았고 그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본다. 그렇게 내 꼬인 마음을 애써 펴보는 것이다.


졸업 준비를 하면서도 냉소와 환멸 쪽으로 몇 벌이고 굴러떨어졌지만 거기 머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전 연구실에서의 나쁜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나름의 진심으로 지도교수님들, 동료들, 심사위원 교수님들을 대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도 진심을 담아 학위논문을 쓰고 진심으로 디펜스에 임했다.


결국 내 박사 디펜스는 교수님 말씀대로, 선배 과학자들과 함께 내가 세상에 기여한 지식의 경계선을 더듬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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