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곧 May 21. 2024

박사 디펜스를 하기로 했는데 막막하고 이따금 슬펐다

밝아진 기분이 이렇게 쉽게 사라지다니


H대학 체류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 박사 디펜스: 박사과정을 마치기 위한 학위 논문 심사 절차로, 최종 발표와 그에 따른 질의응답을 포함한다.


공동 지도교수님께서 계시던 H 대학에 방문해 6주 정도 지내면서 여러 좋은 경험을 했다. 무엇보다 빠르게 새로운 실험을 설계하고 수행했던 것이 좋았다. 정식 실험 허가를 받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마지막 주에 몰아서 종일 실험을 했지만, 다행히 충분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분석을 다 끝내지는 못한 데이터를 싸들고 원래 있던 도시로 돌아왔다. 이제 박사 학위를 받아도 될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자신감이 차올랐고 기분이 좋았다. 초여름이었다.



자신감이 차올랐을 때 학위를 마무리하기로 하고 가을학기 이전에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알아보니 가을학기가 시작한 후 3주 인가 안에 휴학/자퇴/졸업을 하면 등록금을 반환받을 수 있는데, 그때까지가 가을학기 이전에 졸업하기 위한 데드라인이었다. 역으로 기한을 생각해 보니 8월 말이나 9월 초에는 최종 발표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양쪽 교수님들께 졸업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계획을 세워나갔다.  


사실 대학원생이 졸업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서 꼭 졸업이 되는 것은 아닌데*, 다행히 내 경우엔 그게 됐다. 대학원 연차도 꽤 찬 편이었고, 학위를 받으려면 어느 정도의 연구 성과를 내야 한다는 기대치가 나와 지도교수님들 사이에서 비슷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들은 내가 학위 과정 중에 이상한 일을 많이 겪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기에, 내가 가능하면 빨리 졸업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바라시기도 했을 것이다.


* 대학원생 본인이 이만하면 됐다고 느꼈더라도 졸업이 미뤄지는 경우의 예시:

1. 지도교수님이 아직 졸업할 만큼의 성과가 없다고 판단한 경우.
2. 지도교수님이 아직 졸업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
   (이게 정말 나쁜 건데 본뜻―학생이 졸업 전에 일을 더 하고 나가길 바란다거나―은 숨기고 1. 의 경우인 척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더라도 사실 학생이 설득하기는 어렵다.)
3. 심사 위원(커미티)들이 논문이나 발표를 보고 졸업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한 경우.
4. 여러 정치적인 이유가 작용한 경우.




그래서 세 달 정도 안에 디펜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다. H 대학에 있는 동안 차올랐던 자신감과 밝은 기분은 정말 허무할 만큼 순식간에 깎여 나갔다.


혼자 텅 빈 연구실에 앉아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학위논문을 쓰다 보면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곤 했다. 연구라는 게 원래 하루하루 보람찬 느낌이 잘 안 들기도 하고, 정답이나 정해진 방향이 없다 보니 자주 막막해졌다. 막상 박사 학위를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면 아쉽고 모자란 부분이 자꾸 생각났다. 게다가 졸업을 한다고 해서 고생이 다 끝나고 행복해지리라는 전망도 없었다. 진로를 결정해 둔 것도 아니고 일단 졸업부터 하고 보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졸업 후 미래를 생각하면 몹시 걱정스러웠다. (참고로 실제로 지금 백수인데 엄청 심란하다!)


하루하루 성취감이나 보람은 별로 없고, 노력할 방향성을 모를 때도 많은데, 그 고생 끝에 올 미래도 불확실하다니. 이렇게 쓰고 보니 별로 기분 좋을 요소가 없긴 하다. 디펜스를 준비하는 대학원생들은 대체로 꽤 불행해 보이곤 했는데, 그게 당연한 면도 있다.




거기에 더해 내가 겪은 다소 특수한 어려움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여러 봉변을 당하고 연구실을 옮기면서 잃어버린 실적이 많았다. 그래서 학위논문을 정리하다가 아쉬운 마음이 들 때면, '부당한 일을 겪으며 연구실을 옮기지 않았더라면 더 완결성 있는 학위논문을 썼을 텐데, 실적도 더 많았을 텐데, 지금보다 1년은 일찍 졸업했을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이따금 들었다. 부질없는 가정이라서 그 생각에 몰두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불쑥불쑥 억울했다.


졸업 요건을 자세히 읽다 보니 예전 연구실과 관련해 또 주화입마가 찾아왔다. 연구실을 옮길 때 지적 재산권*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는데, 학위 논문 요건에 지적 재산권에 관한 사항이 있었다. 내 입장에서 보기엔 이전 연구실과 학교 측이 자기 할 일을 다 하지 않아서 지적 재산권이 모호해진 것인데, 졸업을 앞두고 문제가 다시 튀어나오니 걱정이 되는 한편 화도 났다.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그들과 이전에 주고받았던 이메일 등을 다시 뒤져보았는데, 정말 다시 봐도 속이 뒤집어지는 궤변이 한가득이었다.


*연구실 이동과 지적 재산권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나는 굉장히 고립되어 있었다. 새로 옮긴 연구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연구실에 출근해도 아무도 못 만나는 날이 많았다. 이전 연구실 친구들과는 여전히 친구이기는 했지만 캠퍼스도 달라졌고, 만나면 이전 연구실 이야기를 들어야 해서 마음이 완전히 편하지는 않았다.


나를 도와주었던 학교 직원들 마저 공교로운 시기에 그 지역을 떠나갔다. 내가 처음 지도교수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내 결심을 지지해 주었던 학교 상담사 K는 이것보다 몇 달 전에 다른 지역으로 옮겼고, 젠더 기반 차별 및 폭력 피해 지원 센터의 C* 역시 이 즈음 다른 직장으로 옮겼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찾아갈 수 있는 C가 학교에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많은 위안이 되곤 했는데, C가 없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막막하고 외로웠다.


* C에게 도움 받았던 이야기:


졸업 후에는 정든 곳을 떠난다는 슬픔도 디펜스 준비 중에 꽤 자주 밀려왔다. 외국이니 앞으로 편하게 자주 다시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좋았던 날들도 있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힘들고 외로웠던 기억이 많은데, 막상 얼마 후면 떠난다고 생각하면 아쉽고 슬펐다. 힘들고 외롭던 와중에도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 창밖으로 보이던 나무, 좋아하던 카페, 동네 고양이를 마주치던 산책길, 노을 지던 강가, 가로등 불빛 아래 밤새 고요하게 눈이 리던 모습 같은 것들.




학위 과정 중에 여러 고생을 하면서 오래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H 대학을 방문하며 잠시 회복된 것 같았던 마음이 다시 괴로워진 것이 좀 실망스러웠다. 어떤 계기를 통해 내가 짠 하고 괜찮아지기를,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지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그럴 만도 했던 것 같다. 디펜스를 앞둔 박사과정 학생은 어련히 힘들게 마련이고, 나는 거기에 더해 여러 추가적인 어려움이 있었지 않나.


디펜스를 앞둔 어느 맑았던 날 출근길

아무튼 졸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졸업을 하기로 했다. 앞서 발행한 글에서 썼던 것처럼 헬스장에 가서 무게를 들고, 매일 연구실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지키고, 스스로를 산책시키고, 좋은 생각이 나면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자전거를 탔고 가끔 마음이 복잡할 때는 자전거를 손봤다. 자전거를 닦고 기름칠하고 고치면서 많은 위로를 받곤 했다. 가끔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거나 퇴근하는 길에 외롭고 슬퍼서 울었지만 계속 페달을 밟았다. 울면서 자전거를 탔다고 쓰다 보니 스스로가 좀 짠하다.


학위를 마치는 것은 성장이고 성취이기도 하지만, 삶의 한 챕터를 덮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삶의 챕터를 덮을 때는 어떤 시절과 장소, 사람들과 이별하기도 하는 것이다.




- 다음 주는 학회 참석 예정이라 연재를 건너뛸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연재를 하는 쪽으로 노력해 보겠습니다.

- 지난 편 조회수가 갑자기 5,000회 이상으로 올라갔는데, 감사한 한편 영문을 몰라서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혹시 지난 편을 통해 제 브런치를 발견하신 분이 있다면 어떤 경로였는지 댓글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