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그러고 보니 나 유능하네?
S 교수님네 연구실에 있던 장비 사용법을 이틀 정도만에 금방 익혔다. 심지어 랩메이트들은 잘 몰랐던 사용법을 내가 알아내서 알려주었고, 데이터 수집 프로그램 코드를 크게 개선하였고, 데이터 수집용 컴퓨터에 자꾸 생기던 오류도 해결해 주었다. '맞아, 내가 하드웨어를 다루는 일과 신호 처리 등에 기초가 꽤 탄탄했지' 하고 오랜만에 유능한 기분을 만끽했다.
거기서 지냈던 몇 주 만에 완전히 새로운 실험을 기획해서 실행했다. 그리고 꽤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다. 몇 달에서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과정인데 내가 번갯불에 콩을 웰던으로 잘 볶았지 뭔가.
코로나 이후 몇 년 만에 사람이 참여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도 꽤 유능한 기분이 들었다. 실험 참가자들과 일정을 조율하는 일부터 그들에게 실험 참가자의 권리를 안내하고 실험을 진행하는 일까지 능숙하게 해낼 수 있었다. 이 부분도 내가 이전에 꽤 엄격한 훈련*을 거쳐 제대로 배웠었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꼈다. 나는 한국에서 석사 할 때 박사과정 선배들에게 배웠던 것인데, 그것을 이제는 내가 랩 메이트들에게 가르쳐주면서** 내가 이만큼 성장했구나 하고 느꼈다.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를 할 때는 특히 연구 윤리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 연구실을 중간에 옮겼다 보니, 나는 S 교수님네 연구실에 제일 최근 들어온 사람이면서도 대학원 연차는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S 교수님 네는 작은 연구실이라 중간에 박사과정 공백이 좀 있었기 때문인지, 선배 연구자에게 배워야 할 만한 것들이 전해지지 않은 부분이 좀 있는 것 같았다.
랩 메이트가 박사 중간발표를 앞두고 있었는데, 발표 준비를 도와주면서 나 스스로의 성장을 느꼈다. 이 친구가 큰 발표를 처음 하면서 많이 어려워하기에,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슬라이드를 하나하나 고쳐 나갔다. 친구는 정말 많이 배웠다며 '너는 이제 교수가 되어도 되겠다, 네가 왜 아직 대학원생인 것이냐'라고 나를 마구 격려해 주었다.
새로운 대학, 새로운 도시에 가서도 물 흘러가듯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는 일, 자전거를 구해서 타고 다니는 일,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랩 메이트들과 놀고 카페와 식당과 여러 동네를 알아나가는 일이 모두 즐겁고 자연스러웠다.
교수님 책장에서 내 취향에 꼭 맞는 과학책을 빌려다 읽으면서 행복했다. S 교수님과는 생각의 결이 비슷한 데가 있어서 그런지 책장에 읽고 싶은 책이 많았다.
여러 세미나에 다니면서 연사들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눴다. H 대학이 내가 원래 다니던 학교보다 규모가 훨씬 커서인지 내 관심사에 맞는 세미나가 자주 있었다.
H 대학에 흥미로운 수업을 하는 교수님이 있다기에 이메일을 보내서 만나러 갔다. (교수님들은 누가 자기 일에 관심 있다며 만나자고 하면 생각보다 잘 만나준다. 대부분 좋아하는 것 같다.) 찾아가서 여러 주제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데 '맞아, 나는 학계의 이런 점을 좋아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학계의 규칙과 문화를 꽤 잘 알고 있고, 학계 사람들과 즐겁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느꼈다.
연구실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맛있는 걸 먹고, 자전거를 타고 소풍을 나가고, 전시를 보러 갔다. 이 친구들도 코로나 기간에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서로 자주 만나지는 않았다며 내가 구심점이 되어주어 좋다고 했다. '건강한 연구실 문화가 어떤 것인지, 사람들이 연결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알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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