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곧 May 07. 2024

가해자를 마주쳐야 할 때

학교 지원 센터에 찾아가 안전 대책을 마련했다


연구실을 옮기고 가해자를 마주치는 일이 두려웠다. 그 사람은 나에 비해 권위와 권력을 가진 자였고 신체적으로도 나보다 강했다. 또한 학계에서의 체면과 평판에 몹시 민감한 듯했으며 상대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매우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고집하던 이상한 타협안을 거절하며 연구실을 벗어났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나에게 와서 직접적인 해코지를 할 가능성은 낮았지만 애초에 워낙 말이 안 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상황이 그 지경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나는 더는 그 사람의 행동 방식을 이해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실은 나에게 무슨 행동을 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냥 싫었다. 가해자와 마주치고 어쩌면 이야기를 나눠야 할 수도 있다는 것, 그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알아볼 수도 있는 것 자체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나는 한동안은 그 사람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만 보아도 놀랐다. 그 사람이 올 법한 장소를 피하기도 했다. 다행히 새로 옮긴 연구실은 원래 연구실과는 조금 떨어진 분원에 있어서 연구실 출근에는 영향이 적었지만 본원에 갈 일이 있을 때는 긴장을 풀기 어려웠다.  


그러다 가해자와 같은 학회에 갈 일이 생겼다. 소규모 학회라서 마주치지 않고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새 지도교수님이나 연구실 친구들은 참석하지 않는 학회라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도 어려웠다. 고민하던 나는 학교 젠더 기반 차별 및 폭력 피해 지원 센터의 직원 C에게 도움을 청했다.



  

C와는 지도교수 변경 과정에서도 여러 번 면담을 했고 그 후에도 때때로 괴로움이 심해지거나 어려운 결정을 내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았다. 학회를 가게 되었는데 가해자를 마주칠 확률이 크고, 그래서 불안하고 괴롭다고,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이메일을 썼다. C는 시간을 정해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했다.


그 사이 C는 여기저기 조언을 구해보았다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선 가해자가 나에게 불필요한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할 근거는 없다고 하였다. 지금이라도 학교에 요청할 수는 있지만 학회 날짜가 임박하니 그전에 행정 처리가 될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C는 지도교수 변경 과정에서 학교 측이 이런 상황을 미리 다루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대신 C는 안전 대책 (safety plan)을 마련할 것을 제안하며 내가 채워 넣을 수 있는 질문지를 인쇄해 주었다. 성폭력 피해자를 염두에 두고 작성된 문서라서 내 상황과는 다르지만, 권력에 기반한 폭력이었고 안전을 위협받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니 유용한 부분을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안전 대책 질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받은 안전 대책  서문


(...) 안전이란 신체적, 성적, 사회적, 영적, 경제적, 정서적, 심리적 위해로부터 보호받으며 그렇게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안전 대책은 당신에게 신체적 또는 정서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을 인지하고, 보다 안전해지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 방안을 찾아내고, 또 추가 폭력에 대비할 수 있게 돕는 실질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안전입니다. (...) 어떤 것이든 당신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수정하고, 적용하십시오. 각자의 안전 대책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 여기에 포함된 사항은 일반론적인 것이며, 적용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우에만 적용하십시오.




안전 대책은 몇 가지 항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C는 우선 정서적 안전 부분을 함께 보자고 했다. 안전 대책 서문에서 밝혔듯 질문지는 내 상태를 스스로 알아차리고, 대처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 여러 항목의 질문지를 이 글의 끝에 덧붙여 두었습니다.


C의 글씨로 채워 넣은 정서적 안전 대책 일부

C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답을 받아 적었다.


내가 정서적으로 위태로울 때 나타나는 경고 신호는:
움직임이 느려진다. 의욕이 떨어진다. 몸이 굳는다. 안전하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긴장된다. 요리하지 않으려 한다. 일을 하지 못한다.
 

나를 돌보거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운동, 음악 연주하기, 글쓰기, 무언가 배우기.


여기까지 받아 적은 C는 모두 좋은 방법이고 건강한 것들이지만, 그것들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들 때 잠깐 정신을 돌릴 수 있는 쉬운 것들도 써넣기를 권했다. 그래서 쓴 것이 두 번째 줄이다.


    유튜브 영상 보기. 실없는 소설 읽기.


이것들은 내가 생산성 없이 보내는 날들에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들이다. C는 그런 것들도 필요할 때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스스로 좀 못마땅하고 부끄럽지만, 아마도 C가 옳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외에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이번 학회의 경우에는) 학회장을 잠깐 벗어나 근처 카페에 다녀오겠다고 적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할 수 있는 친구들도 한국, 유럽, 아메리카 시간대에 적어도 한 명씩 생각해 두었다.


그중 미국에 있었던 선배가 나의 어떤 위태로웠던 순간에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구체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과거의 일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던 때였다. 선배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던 내가 갑자기 울면서 전화를 해서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깊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졌을 때의 대처법을 마련해 두었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도움이 될 줄이야. 전화로 선배 목소리를 듣는 그 순간에 너무 안심이 되어서 눈물이 났다.




C는 안전 대책 질문지 이외에도 구체적인 상황을 상상하고 연습해 보자고 했다. 소규모 학회에서 가해자를 마주치는 것은 꽤 마음에 타격이 갈 수 있는 일이고, 막상 어떤 상황이 닥치면 당황할 수 있으니 미리 생각해 두자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만약 가해자가 접근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에 대한 것이었다.


C: 혹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할 수 있을까?
나: 글쎄. 그때가 되어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아.
C: 그래,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 없어. 그럼 어떻게 거절할지 생각해 볼까?


생각해 보니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C의 말대로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할지 모를 것 같았다.


학회에서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는데 내가 대화를 거절해야 한다면, '미안하지만 (sorry but)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라는 식으로 답할 것이다. 영어에서는 별로 미안할 상황이 아니어도 예의상 sorry를 쉽게 쓴다. 그런 종류의 거절의 말을 생각하다가 내가 C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가해자에게 빈말로라도 미안하다고 하고 싶지도 않고 다른 변명을 대고 싶지도 않다고. C도 동의했다. 우리는 여러 대답을 생각해 보고 평가하고 수정했다. 결국 내가 선택했고 C도 응원한 거절의 말은 이것이었다.


"I do not wish to talk to you."
나는 당신과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여러 번 소리 내어 말했다. 보통의 생활에서는 이렇게까지 직설적인 거절을 하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에 너무 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이 적확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Because that is what it is.

그게 진실이기 때문에.


나는 당신과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단호한 거절의 말이 학회 내내 어떤 마법 주문처럼 나를 지켜주는 기분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학회에서 별 일은 없었다.


가해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고역이었고, 그 사람이 질문을 할 때 목소리나 말투도 듣기 싫었다. 하지만 전처럼 무섭거나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가해자가 나와 지인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려 시도하거나 애매한 거리에서 맴도는 것 같을 때가 있기도 했다. 직접 거절하기에도 애매한 방식으로 접근했기에, 나는 가해자가 대화에 끼어들자마자 대화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갔다. 싫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이 학회 이후로 나는 가해자가 자주 가던 학과 세미나에도 다시 참석하게 되었고 가해자를 마주칠까 봐 긴장하는 일도 차츰 줄었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어도 전처럼 심하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세미나에 갔다가 같은 공간에 있는 가해자 때문에 너무 불안해지면 친구에게 연락해서 나를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몇 번 도움을 받고 나니 전만큼 불안하지는 않았다. 내 불안을 알아차릴 수 있고, 불안이 클 때 어떻게 할지 계획이 있다는 점이 안심이 됐다.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내가 좀 유난이었나 하는 생각도 살짝 드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과론적으로 별 일이 없었을 뿐이지 완전히 안전한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여러 대비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별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지, 학회를 가겠다고 결심할 수는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학교와 세미나, 학회를 불편하고 불안해하면서 연구를 계속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나의 불안과 걱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함께 대처 방안을 고민해 준 C에게 감사한다. 한편으로 나는 C와 함께 채워 넣은 안전 대책 문서를 누군가 만들어 두었다는 사실 자체에도 감동과 위로를 느낀다.


가정 폭력, 스토킹 범죄, 그 외 여러 폭력적인 상황에서 피해자의 불안을 유난이라고 무시하다가 죽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 죽고, 멈출 수 있었던 폭력이 이어지고, 꽃필 수 있었던 가능성이 사그라지지 않나. 피해자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 말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안전하게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피해자 지원의 기본자세이기를 바란다. 누구든 자기 안전을 위한 대비를 하면서 '내가 유난인가' 하는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길 바란다.




아래는 제가 받은 안전 대책 문서의 일부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정서적 안전 대책

- 내가 정서적으로 위태로울 때 나타나는 경고 신호(생각, 이미지, 감각, 기분, 상황, 행동)는: ________
- 내가 스스로를 돌보거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________
- 정서적으로 몰렸을 때 나는 __, __, __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
- 만약 이 전략들도 소용이 없다면, 즉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전문가는:
  의사 ________ / 전화번호  ____
  병원 ________ / 전화번호  ____
  기관 ________ / 전화번호  ____
  기타 ________ / 전화번호  ____
- 만약 어떤 상황에서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 상황에 대처할 방법은: ________
- 나에게 소중하고 살아갈 의미를 주는 것 한 가지는: ________


정보 통신 안전 대책

- 소셜 미디어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는지 살펴보는 방법은: ________
- 내가 원치 않는 나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에 올라가 있다면, 내가 취할 행동은: ________
- 인터넷이나 전화로 오는 연락에 위협을 느낀다면, 나의 대처는: ________


캠퍼스 안전 대책

- 수업에 갈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________
- 캠퍼스에서 내가 가해자를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장소들은: ________
- 캠퍼스에서 내가 가해자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장소가 있고, 그 장소에 가야만 한다면, 나는 __, __, __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
- 내가 캠퍼스에서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거나 위협을 느꼈을 때, 나는 공개된 장소인 __, __, __ (예: 도서관, 학생 식당 등) 등으로 이동하겠다.


주거 안전 대책

- 나는 __, __, __ (예: 룸메이트, 임대인, 건물 관리인 등)에게 나의 상황을 공유할 수 있다.
- 주거 공간에 혼자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나는 __, __, __에게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요청하겠다.
- 위급 상황에서 내가 거주지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________
- 위급 상황에서 거주지를 벗어나야 한다면, 나는 가해자가 알지 못하는 공공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그런 장소에는 __, __, __ 가 있다.
- 가해자가 듣고 있어도 전화 통화를 통해 친구나 가족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암호를 마련하겠다. 나의 암호는 ____이다.
- 만약 가해자와 함께 살거나 가까이 산다면, 급하게 벗어나야 할 경우를 대비해 다음의 중요한 물건을 챙긴 가방을 마련해 두겠다.
휴대전화와 충전기 (  ), 체크카드/신용카드/현금 (  ), 열쇠 (  ), 신분증/건강보험증/면허증 (  ), 중요한 문서들 - 여권/출생증명서/주민등록증/비자 (  ), 여벌 옷 (  ), 의약품 (  ), 기타 (  )


이전 13화 지도교수는 학문적 부모인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