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아버지를 회상하며

언제 어디에 있든 우아하고 멋지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셨던

by Nara Days

얼마 전, 11월 4일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막재를 치르며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재미있는 것은 봉은사의 메인 법당에서 49재를 치르는 동안 외부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법당 안으로 들어왔는데, 49재가 진행되는 동안 그 비둘기가 맞은편 꼭대기로 올라가 그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약 두 시간 동안 진행된 49재의 의식 동안 또 신기했던 것은 이미 돌아가신 지 8년이 (올 해로선 9년째이다) 된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의 생각 역시 많이 났다는 것이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어떠한 사건은 묻어둔 기억들을 가지고 오는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묻어둔 여러 가지 들을 마주했다. 작고 정갈한 친할머니 댁에 들어서면 나는 특유의 향긋한 향, 화장실에서도 났던 깨끗하고 따뜻한 향, 늘 스모 채널을 틀어놓고 부채질을 하며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경기를 보시다 중간중간 방으로 들어가셔서 쇼스타코비치나 라흐마니코프의 음악을 틀고 누워 명상을 하시던 할아버지, 그리고 유달리 과묵한 할아버지 때문에 심심해하시며 늘 며느리들이 와서 함께 수다를 떨기를 바랐던 나의 작고 예뻤던, 유달리 외유내강이었던 친할머니까지.


그래서 오늘은 몇 달 전 썼던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에 이어,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나의 친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1월 1일은 친할아버지의 양력 생신이기도 해서, 매 해 신정을 맞이하며 할아버지 케이크도 같이 불었던 추억이 있기에.


2013년 여름에 돌아가신 나의 친할아버지는 굉장히 키가 크시고 멋있으신 분이었다. 전형적인 서울 신사였다. 할아버지는 조금씩 구사하는 언어를 다 포함하면 총 9개의 언어 (한국어 외에 일어, 영어는 원어민처럼 구사하셨고 그 외에 러시아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어 등을 조금씩 하셨다)를 구사하시는 당시에는 쉬이 볼 수 없는 분이었다. 본인의 작은 방을 늘 정갈하게 정리하고, 매일 오전 신문의 주요 기사를 스크랩하는, 그리고 필기와 기록을 즐겨하는 분이었다. 할아버지의 작은 방에 들어서면 오래된 스테레오에서는 늘 새로운 클래식 음악이 나왔고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그 음악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다. 클래식에 관심이 없던 당시의 나는 그 음악가가 누구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리가 없었다.


매 해 여름 한국에 들어왔을 때 할아버지는 나의 러시아어가 얼마나 늘었는지 러시아어로 나와 주거니 받거니 하셨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현지 정치나 문화 등에 대해서 많이 물어보셨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만큼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해 못마땅한 내색도 하셨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본인의 관심사에 있어 궁금해하셨던 할아버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께 혼쭐이 났던 기억도 있는데, 스물다섯이 되었을 때 나름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첫 월급으로 봉투에 돈을 넣어 생신 때 드렸을 때 지폐들의 방향이 다 같지 않았던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이런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모르고 돈을 넣었냐고, 밖에서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혼을 내셨는데 할아버지가 워낙 화를 잘 안 내시고 점잖으셨던 분인지라 그 꾸지람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할아버지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만주에 있는 건국대학교 (서울에 있는 건국대 아님)에서 학부를 졸업한 학생이셨는데, 건국대학교는 만주국의 관료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학교였고 오로지 문과만 뽑았으며 관료직 100% 보장에 생활비도 지원이 되었고 당시에는 경성대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학교로 치부되었으며 찾아보니 가난한 수재들이 많이 갔던 대학이라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건국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총 91명이라고 하며, 당시 구소련의 주요인물 트로츠키 등을 교수진으로 영입 하려고 했다고 한다. (2023년 추가 참고기사: [모던 경성] 만주 건국대, 조선 엘리트 청년의 탈출구?) 그렇게 만주에서 대학 생활을 하시고, 귀국 후 조선이 해방된 후 6.25가 발발하여 한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시다가 나중에는 한국에서 교직에도 계셨고 여러 학문을 요하는 직업을 가지셨다고 한다. 워낙 사회학, 여러 사회 이념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등에 관심이 많으셔서 당시 한국에서 '금지되는' 책들도 가지고 계셔 난감한 경험들을 하셨던 기억들도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외국 여행이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직업적인 이유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당시 현지의 지식인들 및 학생들과도 많이 교류를 하셨는데, 덕분에 나의 집에는 1960-80년대 사이 출판된 책들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그 책들 사이에 할아버지가 꽂아놓은 그때의 흔적들이 너무나도 인상적인데, 파리의 어느 서점 옆 어느 카페에서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영수증 위에 써놓으신다거나, 아니면 현지에서 꽃잎을 하나하나 따서 책 사이에 말려놓는 등의 로맨틱한 행동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기록들과 책들 속에서 할아버지의 감성과 역사를 찾는 일은 "보물찾기"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여하튼 할아버지의 그런 인문학적 감성 덕인지 할아버지의 자손들은 각자 외국과 연도 많으며 자기 분야에서 뜻하는 공부를 했고 공통적으로 모두 외국어 등을 잘 구사한다.


1970년 중반에 할아버지가 구매하신 터키에 대한 책 - 그 사이 장미 꽃잎이 말려져 있다.
1979년, 프랑스 현지에서 식사 후 책에다 꽂아두신 메모
할아버지는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언어, 역사 그리고 사회 등에 관심이 많으셨다. 모두 출판된 지 40-50년이 된 책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보관이 되어있다.
할아버지가 읽으셨던 '위대한 유산' 속 할아버지의 메모, 애인이 번역가에게 800원 주고 의뢰해 '츠보타 죠우지'의 시인 것을 확인했다

할아버지는 금전적인 욕심이 없으셨다. 명예욕도 없으셨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가 돈을 쓰는 유일한 곳은 책, 그리고 필기구였다. 아, 그 와중에 입맛은 정말 고급이셔서 좋고 정갈한 음식만 드셨는데 그건 할머니가 그러한 할아버지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좋은 밥상을 내어주실 수 있었던 덕도 있다. 여하간 할아버지는 정말 세속적인 욕심이 없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깐깐하다 느껴질 정도로 청렴한 분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옆에서 많이 답답해하셨던 것 같다. 내가 두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친형은 높은 관직에 계셨는데 (큰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정치생활을 하시며 몇 번의 장관 그리고 국가 부총리 등을 역임하셨다) 소위 말하시는 "형보다 머리가 더 좋은 동생"이 무언가 한자리를 하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볼맨소리들을 들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친구도 많이 없으셨고 원하는 것은 "세상과 지식을 탐구하고 마음은 평안할 것" - 이 것 하나뿐이셨다. 주변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보며 다들 답답해 가슴을 치기 바빴지만 할아버지는 늘 본인의 작은 방을 '케렌시아' 삼아 여러 책과 음악으로 채워놓으셨고, 그 속에서 매우 행복해하셨다. 돌이켜보면 어쩜 그 작은 방과 책장이 그리 정갈하고 야무지게 정리가 되어있는지 신기할 다름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한국에 갈 때마다 본인이 새로 챙겨놓은 빳빳한 종이들을 주셨고, 난 그 종이 위에 그림을 열심히 그리며 할아버지 집에서의 무료함을 견뎠다.


할아버지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늘 우아하게, 기품 있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것들은 절대 돈으로 사들일 수 없는, 무언가 '소비'해서 쉬이 얻어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맛있는 음식을 꼭꼭 씹고, 입 속에 음식이 보이지 않게 먹는, 그리고 음식을 남기면 안 되고 수저를 사용할 때 팔을 어떻게 이용해야 옆 사람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지 등의 식사 자리의 매너 등을 알려주셨고, 단순 디저트를 먹을 때에도 꼭 유리그릇에 덜어 쟁반에 받혀먹어 티스푼을 사용할 것 등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내가 정말 관심 없어했던 스모의 룰 따위도 알려주셨다. 본인이 어디에 있든, 얼마를 소유했던 마음만은 가장 우아한 부자로 살 수 있는 마인드와 문화, 그리고 가풍 같은 것을 심어주셨고 높은 자존감으로 살 수 있게끔 해주신 분인 것 같기도 하다.


세 남매의 막내인 아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고노와다 (일본식 해삼내장)가 드시고 싶다 하셨는데, 당시 최고급으로 사드리지 못한 것, 그래서 할아버지가 한 입 드시고 "일본 갔을 때 먹었던 맛이 아니네"라고 아쉬워하셨던 것이 돌이켜보면 가장 가슴에 사무치는 기억이라고 한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드시기 바라시던 것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그렇게 보낸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아직도 와인잔을 한두 잔 기울이신 후 이야기를 한다. 그러한 아빠를 보며, 나는 어느새 60대 중후반이 되어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젊지만 그래도 더 이상 '중년'이 아닌 아빠의 모습에, 어느덧 할아버지를 많이 닮아버린 아빠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찡하다.

아빠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빠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할머니 할아버지 결혼식 (고모님이 1951년생이니)

가족이라는 것은 단순히 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나의 가족 -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그리고 동기간까지 - 각자의 경험은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내가 지금 나의 모습으로 자라는 데 있어 비옥하고 단단한 땅 같은 기반 토대로 대체 불가능한 가족의 문화와 가치관, 자존감 등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것 위에 나는 나의 경험들을 쌓아 올리며 지금의 나로 자라왔다. 단순 금전적인 유산보다 더 값진 문화, 가치관, 생각 등의 무형적 유산을 많이 받은 나는 할아버지를 회고하며 다시 한번 감사하단 생각을 한다. 활자와 음악, 필기와 기록 등을 좋아하는 나를 보면서 그의 모습을 많이 떠올리기도 한다.


할아버지가 80년 대 즈음에 필기하셔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책 속에 꽂아 놓으신 츠보타 죠우지의 시를 번역하니 아래와 같았다.


"유년은 꽃과 같고, 청년 때는 새와 같고, 중년 때는 풍설과 같으며 백발 때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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