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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Oct 03. 2023

분홍색 나뭇잎

환절기를 맞이하면 연례 행사를 치르듯 아이는 들어차는 코를 푸느라 정신이 없다.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도 숙소에서도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자다가도 코가 막혀 잠에서 깨어났다. 먹는 약은 있었어도 계절이 변화하는 환경에는 장사가 없는지 약이 듣지 않았다.


“몸이 낮아지는 기온에 적응을 하면 콧물도 멈출거야.”


아이와 같이 비염을 공유하는 남편이 아이에게 수차례 말했지만 아이는 코를 풀 때마다 힘이 드는지 짜증을 냈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는 날 연휴에 여는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고 둘이서 집에 오는 길. 걸어서 1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걸어가자는 아이. 아이의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에어팟을 꺼내어 한짝씩 나눠끼니 아직은 귓구멍이 작은 아이 귀에서 이어폰이 빠진다. 그래도 악착같이 음악을 듣겠다고 손으로 고정하고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하며 걸었다.


간만에 동생없이 엄마와 둘이 오순도순한 시간이 좋은지 아이는 계속해서 내게 기대고 팔을 잡아끌고 매달리고. 잠깐씩 멈춰서서 내 옷 냄새를 킁킁 거리며 맡고. 사랑한다 좋아한다가 들어간 문장을 연발한다.


“나는 엄마 팔뚝이 제일 좋아. 말랑말랑하잖아. 나도 이런 팔뚝이 갖고 싶어. 비법이 뭔가요.”


그러던 중 걷는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니 웃음이 새어나오는 입에 힘을 꼬옥 주고서 콧구멍이 살짝 벌렁거리는 아이의 표정이 보인다.


“솔이야, 엄마랑 음악 들으면서 걸으니까 좋아? 왜 자꾸 웃음을 참아?”

“엄마. 나 이럴 땐 MBTI에서 E랑 I중에 I야. 표현하기 좀 쑥쓰럽고 드러나는 게 긴장되니까. 들키는 건 더 부끄러워.”

“엄만데 뭐 어때. 엄마랑 현이는 좋으면 막 깔깔 좋아 죽고. 짜증날 땐 막 짜증내는데 솔이랑 아빠는 다른 것 같아.”

“맞아 아빠는 웃음도 참다가 갑자기 터뜨려. 좋은 것도 좀 참는 것 같아. 나랑 비슷해.”


아이에게 저기 길 끝까지 이야기 하지 말고 걷자고 했다. 지금 듣는 이 음악과 함께 걸은 뒤 저 끝에서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들었는지 말해보자고 제안하니 흔쾌히 알겠다고 한다. 길의 끝에 도착한 아이가 말한다.


“분홍색 나뭇잎 같았어. 그니까 봄. 봄 느낌인 거지. 모든 게 시작되고 따뜻해지는 느낌. 이 음악이 그런 느낌이었어. 사람들이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나무 밑에서 유모차를 끌고 손을 잡고 소중한 사람들과 걸어가는 거야. 그 느낌이더라. 그런데 분명히 좋은 게 맞는데 좀 어딘가 슬퍼. 그래서 그만 듣고 싶기도 해.”


이후로도 같은 단어를 보고서 떠오르는 생각을 말해보고, 오르막길에서 서로 엉덩이를 밀어주고, 초등학교 앞 신호등은 왜 노란색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고.


여행도 좋았지만 아이와 걷는 1시간 남짓한 이 길. 슬슬 낙엽이 떨어지고 연휴 끄트머리 아침이라 사람도 없는 이 황량한 길이 더없이 특별해진다. 아까 아이가 한 말들이 걷는 내내 가슴을 가득차게 만든다.


분홍색 나뭇잎, 따뜻함, 모든 게 시작되는 느낌, 소중한 사람들, 슬프다는 감정.


서른이 넘었는데 여전히 세상은 배울 것 투성이다. 음악을 듣고 분홍빛 나뭇잎이라고 표현하는 아이의 마음에 대하여. 행복은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높은 곳이 아니라 지금 아이와 걷는 이 길 가운데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 대하여. 나 자신이 지겹고 버거울 때도 내가 나를 배반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사람과 상황을 조금더 오랫동안 길게 지켜보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에 대하여.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두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연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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