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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소이 Oct 22. 2021

첫사랑

글라라는 스무 살이었고,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였다. 글라라는 세례명이었다. 그녀가 다니는 성당은 시골 마을에 있었다. 신자 수가 백 명이 안 되는 작은 성당이었다. 그녀는 주일학교 교리교사였다. 교리교사가 되면 큰 도시에 있는 교구청에 가서 신입 교사 연수를 받아야 했다. 그녀는 2박 3일간 연수에 참여했다. 낯선 이들과 한 조가 되었다. 그곳에서 엘리야를 처음 보았다. 은테 안경과 곱슬머리 커트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수녀가 자기의 꿈이라고 밝혔다. 그때 엘리야는 글라라의 꿈이 멋지다고 격려해주었다. 엘리야는 그녀보다 한 살 많았고, 행정학을 공부 중이었다. 유머 감각이 있는 남자였다. 연수가 끝나자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며칠 뒤 글라라는 엘리야가 다니는 학교로 찾아갔다. 연락하지 않고 찾아갔기에 행정학과가 어디 있는지 헤매었다. 조교실까지 찾아가서 그를 찾는 통에 학과는 발칵 뒤집혔다. 그날 오후 늦게 그녀는 엘리야를 만났다. 엘리야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출현으로 당혹스러웠다. 엘리야는 글라라의 순수한 감정을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거리를 두었다. 그들에게는 신앙이 먼저였다. 두 사람은 연인도 아니었고, 친구 사이도 아닌 애매한 관계였다. 글라라는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한다는 엘리야의 상황을 듣고 이성적인 감정을 차츰 내려놓게 되었다. 그 와중에 엘리야는 군대에 갔다. 부산으로 자대 배치를 받은 엘리야는 글라라에게 편지로 군대 생활을 알렸다. 보고 싶다는 말도 남겼다. 휴가 때 엘리야는 글라라를 찾아왔다. 엘리야는 제법 늠름했고 성숙해 보였다. 데이트할 때 그들은 손을 잡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편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가슴 한쪽이 늘 아렸고 신께 죄를 짓는 아픔이 있었다. 글라라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수녀원 입회를 준비했다. 그즈음 엘리야도 제대하고 신학교 입학을 준비했다. 엘리야는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합격 소식을 그녀에게 제일 먼저 알렸다. 글라라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구도자의 길로 가기 전에 얼굴을 봐야 했다. 엘리야는 짧게 커트 친 글라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글라라는 쑥스러웠지만, 히죽 웃었다. 그리고 악수하고 헤어졌다. 두 사람은 성직자의 길과 수도자의 길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편지로 종종 안부를 전했다. 글라라는 엘리야가 그리웠다. 하지만 다가설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글라라는 수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입회한 지 2년 반 만에 수녀회에서 나왔다. 그 사이에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삐삐가 사라지고 손전화가 보급되었다. 그녀는 전에 다니던 시골 성당으로 돌아갔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 했다. 성당에서 그녀는 교리교사 봉사를 했다. 부모님은 그녀가 수녀원에서 나온 걸 무척 창피해하셨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집안에서 사제나 수녀가 나오길 고대했다. 그러나 큰딸이 그 꿈을 깨뜨려 무척 실망했다. 그녀는 작가의 길을 걷고 싶었다. 서울에 있는 모 대학 문예창작과에 실기로 합격하였다. 부모님은 그녀의 길을 반대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부모님이 바라는 딸로 살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등록금 마련을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했다.

  어느 날, 그녀의 손전화로 낯선 번호가 찍혔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글라라? 엘리야의 목소리였다. 글라라는 전화를 다급히 끊었다. 엘리야가 손전화 번호를 어찌 알았을까? 그녀는 부끄러웠다. 엘리야에게 수녀회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아니 밝히기 싫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엘리야의 신학교 추천 사제가 글라라가 다니던 시골 본당으로 부임했다. 방학을 틈타 엘리야는 추천 사제를 뵈러 갈 겸 시골 성당으로 찾아갔다가 사무실에서 교리교사 연락처를 보고 글라라의 소식을 접했다. 글라라는 엘리야에게 전화하고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엘리야는 예전보다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반면 글라라는 세속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엘리야는 글라라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격려해주었다. 신학생이 여자와 사적으로 단둘이 만나는 것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엘리야는 글라라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글라라는 그 고백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엘리야와 글라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스무 살의 첫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이었다고 보석처럼 간직하기로 했다. 그 후 엘리야는 거룩한 사제가 되었고, 글라라는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결혼하고 여덟 살 아들을 둔 엄마가 되었다. 글라라의 아들은 얼마 전 세례를 받았다. 아들의 세례명은 엘리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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