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의원에 출근할 때 도시락을 싸다닌다. 개원하고 처음 6개월 정도는 업체에서 도시락을 배달시켜 먹었다. 가장 간편했지만 4~5개월쯤 먹다 보니 매번 반찬이 달라져도 왠지 똑같은 맛인 것만 같았고, 더 이상 물려서 못 먹겠다는 순간이 오길래 배달을 끊었다. 개원 시작부터 함께 했던 업체라 그런지 한의원을 함께 키워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지막 연락을 드릴 때 뭉클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열심히 동네를 누비며 식당들을 탐방하는 시간을 보냈다. 우리 한의원은 감사하게도 먹자골목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서 '오늘은 뭘 먹으러 가볼까?' 하며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3~4달 정도는 돌아다니며 혼자 먹으러 가기 좋은 식당들을 섭렵했다. 그러고 나니 매번 사 먹는 점심 가격에 부담이 느껴지기도 했고, 간단히 먹고 싶은 날에도 과식을 하게 되는 게 불편해 도시락을 직접 싸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생각보다 도시락 싸는 과정은 재미있었다. 물론 아직 얼마 안 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메뉴를 계획하고, 장을 보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하고, 도시락에 담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면 그 어느 때보다도 보람차다. 내가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감각이 또렷이 느껴져서일까.
그러고 보니 요즘 참 행복하단 생각이 자주 든다. 건방진 생각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 가장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시절을 지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삶의 질에 기여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더 이상 시험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초등~고등학교 12년, 대학교 6년에 대학원 4년까지 마쳤으니 거의 22년의 시간을 시험공부와 숙제로 보낸 셈. 막상 숫자로 계산해 보니 숨이 콱하고 막힌다. 지긋지긋할 만도 했네...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까진 공부가 재밌다는 생각도 종종 했었다. 많은 과목을 다양하게 배웠고 그중에는 순수하게 재밌어서 공부했던 것들도 있었으니까. 그 시절의 나는 외국어 공부를 참 좋아했고, 윤리와 사상 시간에 배우는 철학자들 이야기도 좋았다. 한국 지리 시간도 즐거웠는데, 우리나라 구석구석의 토양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날씨는 어떻게 다른지, 그런 차이들 때문에 어떤 산업이 발달했는지 배우는 게 이유 없이 좋았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진로로 연결하는 건 좀 어려웠다. 나라에서도 이공계 학과를 장려하던 시기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뭔가... 쓸모없는 지식처럼 취급받는 게 좀 슬펐달까. 하지만 혼자 슬퍼해봤자 뭐 하겠나. 쓸모 있는 거 해야지 싶어 나도 결국 이과 계열로 교차지원해 대학을 갔다.
솔직히 대학교에 들어간 후부터는 공부하는 재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저 똑똑한 친구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하던 시간이었으니까. 또 유급이란 제도가 있어서 항상 밀려나면 낭떠러지라는 느낌으로 공부하곤 했으니 심적으로 좀 버거웠다. 그 시간을 통해 분명 성취하고 얻은 것도 많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이 그저 만족스럽고 행복할 따름이다. 아침이면 출근할 곳이 있고, 점심엔 내가 직접 싼 도시락을 먹고, 저녁엔 요가를 가고, 뚝딱뚝딱 요리를 하고, 청소와 설거지를 한 뒤 깨끗해진 집을 보고, 때론 가족들과 모여 고기를 구워 먹고, 남편과 앉아 야구를 보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문우들과 나누고. 나는 이거면 됐는데, 결국 이렇게 살고 싶어서, 그 긴 시간 동안 막연한 불안을 가득 안고 지냈어야 했나. 그런 생각이 들어 울컥하는 저녁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코칭 겸 상담을 받는다. 요즘 참 행복한데 동시에 슬픈 마음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나라에서 교육받으며 자란 사람들은 무언가를 인내하고 참는 능력이 과하게 발달했다고 한다. 반면에 좋은 걸 받는 능력은 좀 부족하다고.. 받는다는 건 그러니까, 좋은걸 기꺼이 받아서 누리고, 지속시키고, 확장시키는 걸 말한다. 받는 것도 능력이란 생각은 낯설고 신선했다.
그동안 살아온 관성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선생님은 앞으로 한동안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파고들어 가 보자고 제안해 주셨다. 그 끝에서 무언갈 만나면, 그게 뭔지를 알면, 오히려 지금을 살고 미래를 계획하는 게 훨씬 편해질 거라고.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보자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 그래서 앞으로 살고픈 삶의 모습까지. 그런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보는 건 처음이다. 매번 당장 쓸모 있는 게 뭔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이젠 쓸모를 떠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들여다보려 하니 왠지 겁이 나면서도 묘하게 설레는 기분이다. 이게 다 도시락에서 시작된 생각이라니, 도시락을 싸다니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