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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Jun 15. 2024

천직을 만나는 방법

진료실 이야기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겪었던 일들로 좌절에 빠져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일들은 어느새 몸과 마음에 트라우마로 남아 환자를 보면 나에게 해코지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고, 어느 순간 침을 놓으려 하면 손이 덜덜 떨려 더 이상 진료를 볼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때가 겨우 27살, 대학을 졸업하고 일한 지 딱 1년 만이었다. 그렇게 내게 첫 사회생활은 쓰디쓴 맛이었다. 


그땐 세상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날개를 펴보기도 전에 꺾여버린 것만 같았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새삼 대견하다. 한의사의 미래를 암담하게 전망하는 동료·선후배들도 많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일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해본 나로서는 한의사로서의 역할을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지금의 상태가 감사할 따름이다. 




'천직'은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 
이나모리 가즈오 <왜 일하는가> 중에서


나는 정말 어쩌다 보니 한의사가 됐다. 한의사가 꿈이었던 적도, 심지어 의료계 어떤 직군을 장래희망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간직한 꿈을 이룬 분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한가득 든다. 그런 일은 타고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읽었던 책에서 '천직'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란 말을 보고 희망을 느꼈다. 어쩌면 한의사란 직업이 내게도 딱 맞는 옷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좋은 일들을 더 많이 경험해 보려 노력한다. 의도적으로 좋았던 일들에 집중하고, 보람찼던 순간으로 힘들었던 순간을 감싸보려 한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차곡차곡 모으듯, 그렇게 좋은 기억들을 자주 쌓다 보면 그 기억들이 곧 한의사로서의 정체성에 튼튼한 뿌리가 돼줄 거라고 믿어 보면서. 




"동네 가까운 곳에 이런 한의원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그래서 오가면서 항상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이 한의원에 오기 전부터 몸이 불편할 때마다 내원하셨던 연세가 지긋한 남자 환자분께서 해주신 말이다. 멈추지 않길 바라는 공간,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줬으면 하는 공간. 우리 한의원이 어떤 분께는 단순히 아픈 곳을 치료하러 가는 곳 이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책임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환자와 주고받은 미소, "선생님 정말 약손이세요." 칭찬해 주시던 한 마디, 고마운 마음을 서로 나누었던 순간들을 켜켜이 쌓아본다. 지금은 자신을 위해서. 언젠가는 그렇게 쌓인 마음을 환자분들께도 기꺼이 내어드리는 날이 것이다. 내게 딱 맞는 직업이었다고,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었겠냐고 자부심까지 느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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