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ove an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종현 Jan 13. 2022

오랜만에 눈이 왔다

하얀 눈이 세상을 덮었다. 크리스마스라고 여기저기서 분위기를 살리고 분주한 느낌이지만 나는 늘 세상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난리법석을 떠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 또한 그들 틈에 끼여서 즐거운 척을 한다. 너무 세상과 동떨어진 별난이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주변 지인과 이웃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페이스북, 인스타, 왓츠앱, 카카오톡을 통해 메시지를 활짝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보낸다. 늘 그런 척을 한다. 마치 중요한 일을 챙기는 것처럼 말이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지만.



오랜만에 온 눈을 맞이하기 위해 가까운 곳에 산책을 나갔다. 차로 약 15분 거리인데, 아주 소박한 성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동화에서 혹은 여행 사진에서 봤을 법한 그런 화려한 장식의 성이 아니다. 약간 돈 많은 지주가 살 법한 큰 집 정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소박함이 오히려 솔직한 건물의 구조를 드러내기 때문에 상당히 멋스럽다. 찾아서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멋이 느껴지는 그런 성이라, 개인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이 성 주변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하이킹 코스가 있어 가끔 찾아 가벼운 산행을 즐기기도 한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높은 봉우리 같은 곳이 있어 저 멀리 낮은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차나 한 잔 하기에 딱 좋은 장소다. 


한국 지인들은 스웨덴에 사니 겨울마다 엄청난 양의 눈을 보리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내가 사는 남부는 눈이 자주 내리지 않는다. 그나마 몇 해 전에 조금 더 북부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눈을 볼 가능성은 조금 높아지긴 했다. 그래도 스웨덴 남부에서 눈을 만나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런데 올 해는 이상하게 눈이 자주 온다. 이것이 이상기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눈을 만나면 여전히 기분이 설렌다. 누군가는 군대에서 제설작업을 한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는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스웨덴의 겨울은 낮이 굉장히 짧다. 때문에 늘 어두운 풍경에 지치기 된다. 그렇기에 눈이 오는 날은 하얀색 눈에 반사된 빛으로 세상이 밝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겨울을 이기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남들이 여름 별장을 사고 싶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오히려 겨울 별장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은 그런 겨울에서 연기로 모락모락 나는 작고 오래된 오두막에서 겨울의 중심을 지내는 꿈을 꾸곤 했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사람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요즘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걸 희망한다. 여러 가지 디톡스 중에 사람 디톡스를 간절히 바란다. 이건 내가 사람에 지쳤다기보다는 개인적인 취향이 확고해지는 것 같다. 예전부터 혼자 있길 즐기는 편이긴 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바람이 옅어지고 점점 혼자만의 시간의 고요함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 두 명을 만났다. 

석사 졸업 후 한 명은 남아프리카를 거쳐 현재 런던에서 일하고 있다. 다른 한 명은 딸아이 하나를 둔 일하는 엄마가 되었고 일 변 전에 남부를 떠나 윗 지방인 우메오로 이사를 갔다. 국제개발이라는 과목을 전공했기에 국제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사정상 대부분의 친구들이 스웨덴을 떠났다. 그리고 코로나가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고 모든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아마 나를 비롯한 5명 정도만 스웨덴에 남은 것으로 안다. 코로나로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가국의 사정상 모두들 요즘은 국제적 빈곤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난민이 어디에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 기후변화가 어떤지 등에 대한 관심이 극속도로 식어가고 있다. 뉴스에서 국제적 이슈는 사라졌고, 국제개발의 여러 자금들이 동결되거나 삭제되었다. 역시 사람이란 자기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한다. 지금 당장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이웃 국가의 문제가 눈에 들어올 일이 없지 않은가? 이해는 하지만 씁쓸한 세상의 이치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새해 첫날에 만난 우리는 도시의 대부분이 문을 닫아, 정말 맛이 없어 보이는 인도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내가 주문한 닭고기에는 오래된 냉동식품의 비릿한 냄새가 났고, 카레는 너무 달았다. 인도 델리의 허접한 식당에서 주문한 그 싸구려 카레를 그립게 만드는 음식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로 그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묻고 답하길 반복했다. 내가 스웨덴어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친구들은 스웨덴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나갔는데 신기하게도 친구의 스웨덴어가 이젠 들린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흥미 있다고 느낀 점은, 한 명의 친구는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자본주의에 열렬히 추종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예전부터 환경보호주의자였는데 지금의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가? 그들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조금 더 늙었을까? 조금 더 이상한 성격을 가진 친구가 되었을까? 내가 나이가 들고 있구나를 느끼는 건, 내 얼굴을 보고 실감하게 되는 경우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나이 든 얼굴을 보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저 친구는 참 많이도 늙었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친구도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반대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내 친구들은 참 많이도 변했구나... 를 느끼게 되면, 그들도 나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조금씩 변화를 하지만 그게 발전인지 퇴보인지는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 누구나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게 모든 사람에게 올바른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시선에 크게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들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여전히 눈에 쌓인 동네의 길을 걸었다. 멀리서 보면 그저 하얀색이지만 가까이서 본 눈꽃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돌담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각자가 가진 수많은 결정체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 차가운 푸른빛을 도는 흰색으로 세상을 덮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민들과 배우는 스웨덴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