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병진 Jan 27. 2024

"피부색 다르면 추방" 독일 민주주의, 시험대 올라

“아빠, 학교에서 애들이 다 AfD 싫대. 레비는 아빠가 핀란드, 아나벨라 엄마는 러시아에서 왔잖아, 릴리네 아빠는 미국 사람이야. 다들 엄청 어이없어 해”


딸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더니 대뜸 발끈했습니다. 최근 독일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독일 극우정당 AfD(Alternative fuer Deutschland) 때문입니다. 독일에 거주하는 시민이라면 눈이 뒤집힐 법한 단독보도가 탐사보도 전문매체 코렉티브에서 지난 10일 공개됐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해 11월 25일 동독쪽 포츠담시의 변두리 시골 호텔에 각계각층의 주요 극우 인사들이 회동했습니다. 여기에 코렉티브 기자 잠입합니다.


실제 회동 장면. 출처: 코렉티브


현장에서 기자는 '마스터 플랜'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스터 플랜의 핵심은 ‘재이민’입니다.


호스트

빌헬름 빌더링크

마틸다 마르티나 후스


AfD

Roland Hartwig, 당 지도자 Alice Weidel의 오른팔 , 하원 의원

Ulrich Siegmund, Saxony-Anhalt 의회 그룹 대표

Tim Krause, 포츠담 지구 부대표


MÖRIG 클랜

Gernot Mörig, 뒤셀도르프 출신의 은퇴한 치과의사

Arne Friedrich Mörig, Gernot Mörig의 아들

Astrid Mörig, Gernot Mörig의 아내


네온나치(NEON-NAZIS)

마틴 셀너(오스트리아 출신 우익 극단주의 활동가)

폭력 범죄자로 유죄판결을 받은 마리오 뮐러

젊은 “정체주의자”


주변 조직

Simone Baum, Values Union NRW, 이사회

Michaela Schneider, Values Union NRW, 부이사회

Silke Schröder, 독일어 협회, 이사회

Ulrich Vosgerau, Desiderius Erasmus 재단의 전 이사


기타

알렉산더 폰 비스마르크 헤닝 플레스(Alexander von Bismarck Henning Pless), 극우 극우 대안 실천가이자 밀교주의자

IT 기업가이자 나치의 '피와 땅' 사상 신봉자

오스트리아 출신 신경외과 의사

호텔 직원 2명


이날 비밀리에 회동한 인사들의 신상입니다. 이 자리에는 AfD의 당 대표 알리스 바이델의 고문이자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인사, 현직 하원의원들까지 참석했습니다. 모두 AfD 당원들이고요. 또다른 주축이 된 단체는 정체성 운동, IB라는 단체의 활동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난민은 무조건 되돌려 보내고, 합법적 이민자와 귀화한 사람들까지 재이민시키는 집권 플랜을 구상했습니다. 순수 독일인이 아니라면, 즉 이민 배경이 있는 사람이라면 독일 바깥으로 재이주 시킨다는 겁니다. 독일 영주권자가 아닌 시민권자라 할지라도 피부색이 다르면 재이주를 시키고, 독일 문화에 충분히 동화되지 않은 사람까지 쫓아낸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기시감이 듭니다. 나치 시절에도 순수 아리아인 외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거나 탄압하는 '마스터 플랜'이 이와 비슷한 모임에서 구상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독일 주요 뉴스 첫 번째 꼭지는 모두 극우정당 뉴스인데요. 가뜩이나 최근 이 AfD라는 정당이 집권당을 제치고 독일 전체 정당 지지율 2위에 올라선데다 이로 인한 긴장감이 독일 사회에 유증기처럼 가득 차 있었기에 시민들은 굉장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나치 시절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 ‘인종주의적, 극단적 국가주의가 다시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이 오가던 찰나, 이 AfD가 난민은 물론이고 합법적 이민자까지 모두 추방하는 집권 플랜을 논의한 사실이 확인된 겁니다.


일주일 전 토요일(20)에는 함부르크에서 8만 명이 전면적인 AfD 반대 시위에 나섰습니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독일 전국 각지에서는 총 30만 명에서 최대 1백만 명이 AfD 반대, 해산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1월 20일 집회. 출처: FAZ, ARD, NDR




독일에 이민자가 꽤 많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아시아에서 왔거나, 북유럽, 터키, 영국, 미국, 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가 독일 전체 인구 중 28.7%나 됩니다. 독일 통계청 자료인데요, 2023년 기준 전체 8천4백만 명 인구 중 이민 배경을 가진 사람이 독일 내에 2천4백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을 모두 독일에서 몰아낸다는 구상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프랑스 극우주의 정치인의 대명사 마린 르펜마저 'AfD의 발상과 행보는 우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선을 그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AfD에 대한 독일인들의 지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태티스타가 여론조사 기관의 정당지지율 조사 결과를 종합한 도표. 출처: 스태티스타



AfD의 당 대표는 그 비밀 모임에 참석한 고문을 해임해 어느 정도 자세를 낮추었지만, 그 자리에서 논의된 마스터 플랜을 부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그들이 표방하는 정확한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지지율까지 집권당인 SPD를 넘어서 2위를 달리고 있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당장 이번 주 일요일에 총선을 치른다면 어느 정당을 찍겠는가' 설문 결과를 종합한 스태티스타 자료를 보면 모든 여론 조사 기관에서 AfD는 20~24%의 지지율로 1위 CDU/CSU의 뒤를 바짝 쫓고 있습니다.



보도 이후, 오히려 매일 130~150건의 입당 신청서가 쇄도하고 있어 표정 관리 중인 AfD 당대표. 출처: FAZ



이런 가운데 독일 사법부에서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일 헌법재판소가 AfD와 비슷한 신나치주의 정당 NPD(Nationaldemokratische Partei) 독일 국민민주당에 정당 국고보조금을 6년 동안 박탈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NPD는 현재 Die Heimat(고향)라는 이름으로 바꿔 활동 중인 군소 극우정당인데요. 독일 헌법재판소는 이 정당이 독일 헌법과 민주적 질서를 훼손하려는 목적의 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결했습니다.


헌재는 “이 정당의 목적, 당원과 지지자의 행태를 보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제거를 지향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자유의 적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준 판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낸시 페이저 내무부 장관은 “헌재의 결정은 민주주의국가가 헌법의 적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독일에서는 표현의 자유 등을 존중하며 정말 극단적인 사상의 정당들이 활동을 하고 있지만, 민주주의 질서를 훼손하고 헌법의 가치에 반하는 경우에는 보조금을 끊거나 최대 정당 해산까지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과거 통합진보당이 해산됐던 사례가 있는데, AfD 역시 해산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1952년 사회주의제국당이 나치당의 후계자로 확인돼 위헌 결정으로 해산됐었고요. 1956년 독일공산당(KPD)도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는 해산된 곳은 없습니다.


과거 2000년대 초반 NPD에 대한 두 차례 해산 청구 심판이 진행됐는데, 당시에는 모두 헌재가 기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AfD가 명백한 반헌법적인 활동을 한 정황이 드러난 만큼, 적어도 정당 보조금 금지 등의 여러 제재가 AfD를 대상으로 논의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독일 정당 지지율 1위의 자매정당 CSU의 마르쿠스 쇠더 바이에른주 총리는 정당해산까지 가는 건 어려워보이지만, 적어도 NPD의 정당보조금 제외 판결이 AfD의 청사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독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독일이 연초부터 극우주의 정당을 둘러싼 이슈로 몸살을 앓고 있는 모습인데요. 항상 이럴 땐 우리가 배경을 따져봐야 합니다.


첫째로는 독일 현 정권의 실정입니다. 가령 지난해 독일의 예산 국회에서 코로나19 비상자금으로 마련된 예산을 2024년도 예산안에 전용하려다가 헌재의 위헌판결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예산이 600억 유로 정도 되거든요. 100억 유로가 현재 환율로 14조 2천억 정도입니다. 한화로 82조 2천억쯤 되는 예산이죠. 숄츠 총리는 2021년도에 사용되지 않은 코로나 대응 예산을 기후 보호, 경제 발전을 위한 투자금으로 전용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법부가 이를 막은 겁니다.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해 조성된 세금인 만큼, 그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게 이유입니다.


이에 야당에서 비판이 쏟아졌는데요. 전기*가스 가격 상한제가 내년초에 종료하기로 돼 있는데 정부가 예산 수급을 위한 꼼꼼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거라며 강력 비판했습니다.


올라프 숄츠 정부는 다급하게 증세, 보조금 삭감 등의 미봉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때문에 보조금 삭감과 유류세 인상에 격분한 농민들이 연초부터 트랙터를 몰고 베를린과 함부르크, 뮌헨 등 전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둘째로는 경기 침체 상황 속에 이렇다할 경제적 돌파구를 올라프 숄츠 내각이 찾아내지 못 했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 에너지 가격 상승 등으로 독일 경기가 상당 부분 위축돼 있었습니다. 물가가 치솟고 삶이 팍팍해지니 빈 곳간에서 사람들 인심이 잘 안 나기 마련입니다.


셋째, 보다 근본적으로는 반이민 정서가 2015년 메르켈 총리의 시리아 난민 수용 이후 점차 커져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난민 가족의 자녀들이 기존 아이들과 마찰을 빚는 일이 허다합니다. 난민 자녀들로 인해 성범죄가 발생하고, 심지어 '우리 문화권에서는 남자가 청소를 절대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 여자 아이들만 교실 청소를 하게됐다는 류의 에피소드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소말리아 이민자가 대낮에 코코넛칼로 시민을 살해했던 사건은 독일 사회에 부인하기 어려운 반난민 정서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2023년 뷰어츠부르크에서 당시 22세 소말리아 남성이 노상 카페에 앉아있던 시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출처: BR


이처럼 난민을 꺼리게 만드는 여러 이슈가 존재했는데요. 유증기처럼 퍼져 있던 이런 분위기 속에 정권을 교체한 올라프 정권이 국정에 난맥상을 표출하면서 시민들이 AfD에 ‘정권 심판’ 차원의 지지를 표하고 있다는 분석이 독일 언론과 정계에서 나옵니다. 이 갈등의 불씨를 구조적으로 봉합하지 못해왔던 현 정치권이 하루빨리 해법을 내놓아야 할 때입니다.


삶이 팍팍할 때, 약자를 공격하는 본성이 우리 인간에게는 내재돼 있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시대를 초월합니다. 국경도요. 한국도 이민 배경의 시민들은 물론, 귀화자까지 해마다 늘고 있죠. 독일의 이런 정치적 갈등 양상은 머지 않은 한국의 미래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인의 새해 다짐이 한국과 다른 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