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물린여자 18
내가 먹는 약의 종류에는 면역억제제가 있다. 자가면역질환은 면역세포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설치는 질환이니 면역세포를 잠재워야 한다. 그러나 면역세포를 억제하다 보면 몸 상태가 외부 세균이나 질병에 취약해지기 때문에 평상시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코로나 대시대, 주치의와의 상의 끝에 나는 꾸준히 코로나 백신을 맞고 있었다.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도 인터넷을 통해 심심찮게 보았으나, 백신 부작용보다 중증질환으로 인한 장기 손상이 더 큰 우려가 되었기에 나는 꾸준히 백신을 맞았다.
그나마 끝의 끝에 와서 코로나에 걸렸던 이유에는 코로나 백신을 맞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와중에도 막내가 걸렸을 때도, 내가 걸렸을 때도 단 한 번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우리 집 둘째가 혹시 슈퍼 항체 보균자가 아니냐며 웃고는 한다.)
코로나 연차를 마치고 회사에 재출근했다. 감사하게도 주임님들과 선임님이 한마음으로 외쳐주어 내 업무는 늘어나 있지 않았다. 주임님은 내 서류업무를 모두 가져가 주었다. 그런데 내가 없는 5일 사이에 병원에서 우리의 업무 자체를 또 늘리라고 했단다. 이미 윗선까지 다 오케이 된 상황이기 때문에 내가 반대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도 일이었지만 코로나는 간당거리던 몸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위태롭던 젠가 탑이 무너져버린 순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덜덜거리다가 시동이 나가버렸던 10년 된 내 고물덩어리 중고차처럼 내 몸도 출근하자마자 무너졌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조차 힘들었고, 폐부에서 쌕쌕거리는 천공음이 귀로 올라와 삐이- 울리는 이명이 되었다. 평소 5분 만에 올라가던 거리가 20분은 족히 걸리고 환자들과 소통하는 시간에도 지쳐 중간중간 쉬어야 했다. 관절에 기름칠이 되지 않아 타자가 처지지 않았다. 손가락에 다시 마비가 와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집중력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머리가 멍했다.
분명 연차 5일을 모두 사용해 코로나를 몰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끝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학생 때 실습기관에서부터 슈퍼바이저로 인연을 맺어 이제는 친한 지인이 된 선생님과의 전화가 떠올랐다.
때는 5월 말이었다. 퇴근 후 약국에서 파스를 사 돌아오던 길이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과 안부를 나누다가 목소리가 안 좋다는 말에 요즘 몸 상태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다.
“너는 종교를 안 믿어서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믿잖아?”
“그렇죠.”
“갑자기 네가 떠올라서 전화를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그는 이 전화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며, 일을 너무 힘들게 하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지금 당장은 그 직장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그곳을 나오면 생각보다 세상은 넓다고. 네 몸은 언제나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하다며.
“물론 네 상황을 나는 모르지만 정말 몸보다 중요한 건 없거든. 네가 너의 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내가 한밤중에 응급실에 갔던 날,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 내가 응급실에 다녀온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깜짝 놀라셨다. 아무렇지도 않대.라는 딸의 안심하라는 말에도 엄마는 그날 울었다. 항상 강하고 다소 억척스럽기까지 한 우리 엄마가 나 때문에 울었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하루종일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지는 않아.”
20살부터 한 번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 두 개를 했고,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했다. 이직준비를 할 때에도 글을 쓰거나 타로 상담을 하며 돈을 벌었다. 백수가 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그런데 나를 소중히 여겨주던 주위 사람들이 계속 조언했다. 조금이라도 쉬라고.
이 직장이 아니면 병에 걸린 나를 받아줄 곳이 있을까.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도 사치였다. 월요일도, 화요일도 참아보았지만 더 버티기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2주 안에 구급차를 타겠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나는 쉼이 필요했다.
“과장님, 저 퇴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를 앓고 복직한 지 3일 만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