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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즈플 Oct 07. 2023

병보다 아픈 말, 말, 말

늑대물린여자 25



루푸스 활성기를 거치고 4달 만에 거진 15kg이 빠졌지만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지금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입맛이 없는 까닭이 병 때문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기저에는 한국의 다이어트를 유도하는 분위기, 내가 살이 급히 빠지는데도 다들 잘한다 잘한다 손뼉 치기만 하는 상황들이 있었으리라.

우리나라는 건강보다 외모에 더 치중하는 사회이니까. 오죽하면 루푸스로 살이 빠졌다는 사람에게 

“나도 아파도 좋으니까 딱 10kg만 빠졌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그 뒤에 농담, 이라며 웃었지만.


루푸스는 스테로이드를 먹는다. 고용량의 스테로이드는 부작용으로 문페이스를 끌고 들어왔다. 얼굴이 땡땡 부었다. 얼굴이 보름달처럼 부어 새하얘진 나를 보며 지인은 인사치레로 말했다. 


“얼굴 많이 좋아졌네. 병 걸렸다더니 다 나았나 봐?”


스테로이드 연고를 자신도 바르게 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연고에는 스테로이드 많이 안 들어간다며. 나 조금만 발라볼게."


나이를 먹으니 자신도 홍조가 심해지는 것 같다며 연고가 필요하단다.






꼭 외모가 아니더라도 못된 말은 참 많기도 하다.


“수련이 편한가 보다? 얼굴색이 좋아?”


처음 약을 먹기 시작하고 들었던 말이다. 물론 칭찬의 의미는 아니었고 홍조가 사라질 정도로 낯빛이 지나치게 좋으니 수련을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다.


“암도 아니고, 그냥 당뇨 같은 거잖아. 관리하면 되는 거 아니야?”


수도 없이 그 병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 지인은 루푸스와 당뇨의 차이점을 알지 못했다. 매번 내 병을 ‘당뇨 같은 병’이라고 말했다. 불치병이라지만 밥 잘 먹고 사지 멀쩡하니 상대방의 설명을 기억할 필요가 없었겠지.

못해도 열 번은 설명했을 루푸스를 당뇨 같은 병이라고 전혀 다른 병과 묶어서 약만 잘 먹으면 되는 병이잖아?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사람. 루푸스도 당뇨도 가볍게 여기던 그는 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했다. 자신의 기분이 불편해지기 때문이었다.


저 말들의 함의는 이렇다.

난 네 병에 관심이 없다. 이게 상처까지 받을 일인가 싶다면 좀 더 직관적인 말들을 가져오겠다. 


“뭘 그런 걸로 울어요. 자가면역질환 별 거도 아닌데. 약 먹으면 되잖아요.”


루푸스임을 타인에게 처음 이야기했을 때 들었던 말이다.

자가면역질환의 어떤 부분을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다양한 질환들을 본인이 뭉뚱그려서 바닥에 내팽개치고, 환자들의 고통을 별 것도 아니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대방이 차가운 물을 머리부터 끼얹어진 느낌인 줄도 모르는 그 나름의 위로 방식이었으리라. 그 순간 나는 혼자 유난 떠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루푸스로 인해 매번 다른 발에 붕대를 감아대는 내 모습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는지 한 지인은 웃으며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쪽이네요? 붕대 속 상처 한 번 보고 싶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할 때 독을 뿜는 경우가 있다. 붕대 속의 상처를 보고 싶다고 말하던 그녀의 입에서는 분명 독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뒤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으로 그녀에게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붕대를 까 내 퉁퉁 부은 발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로 멀어지는 사람을 멀거니 서 보았다.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다. 당장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가 너무 많고 또 크기 때문이다. 언제나 불행은 다양하고 또 상대적이어서, 남이 칼에 찔린 상처보다 나의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훨씬 아픈 법이다. 내게 저런 말을 한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불행을 가지도 있었고, 나에게 자신들의 불행을 토로하던 사람들이다.


이해한다. 자신의 불행이 커 남의 불행이 별 것 아니어 보일 수 있다는 점까지는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래도 우리 적어도 각자의 불행이 각자에게 가장 버겁다는 사실정도는 인지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말을 조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네 불행은 내 불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 말을 할 수 없으니 내 병을 잔뜩 후려칠 때마다 나의 아픔은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워졌다. 말했다가 또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올까 봐 입을 여는 상황 자체가 꺼려지게 되었다.


하지 말란 것도 참 많다. 이 말도 불편하다, 저 말도 불편하다, 그럼 어떡하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 또한 멋쩍게 웃겠지.


언젠가, 누군가 했던 말이 참 인상 깊게 남아있다. 


입이 하나고 귀가 두 개인 이유를 알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듣는 것이 좋다. 병에 걸린 친구에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인터넷 속 질문은 그 자체로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 사람의 친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위로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을 친구로 곁에 두고 있으니.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그 고민이 담긴 말은 상대에게 충분히 전해지리라.


쉽게 꺼내는 위로는 가볍다.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한 말은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노력한 언어는 태가 나기 마련이다.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예민해지므로, 그런 태를  더 예민하게 잡아내고는 한다. 그런 때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기보다 한마디라도 한번 더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짧아도 표정과 몸짓에서 느껴졌던 진중한 위로와 격려들에서 큰 힘을 얻어온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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