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을 통해 만난 것도, (대외적으로는) 이성적 관계 발전에 여지를 두고 만난 것도 아닌 그저 인친(인스타 친구) 관계였으므로, 그 이후로 우리 관계는 썸, 아니 그 바로 이전의 단계에 있는 듯했다. 아침부터 카톡을 주고받기도, 출퇴근길과 자기 전에 짧지 않은 통화를 하기도 하며 서로 간의 연락은 확실히 늘었지만 서로의 생활에 터치할 수 없는 관계. 주말에 뭐해, 라는 말을 왠지 꺼내기 힘들고 약속이 있다고 하면 누구요? 혹시 이성 친구?라는 말을 하기 어려운 관계.
사실 돌아오는 이번 주말엔 진짜 소개팅이 예정되어있었다. 그와 연락하기 얼마 전 일이었다. 협력사 대표의 ‘잘 지내고 있냐’는 갑작스러운 연락에 반색하며 어머, 대표님. 웬일이세요. 저는 별일 없죠. 예에, 매번 똑같죠. 뭐,라고 대답했던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렇구나, 그 한참 어린 연하남이랑은 헤어진 거죠?
예? 사귀었던 것도 아셨나요?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질문할 뻔했다. 하지만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곰곰 생각해보니 두어 번 그녀가 내 인스타그램 게시글에 ‘좋아요’를 표현했던 게 기억났다. 그녀 역시 나와 ‘인친’ 관계였으므로, 그녀가 나의 연애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연예인이 아닌 신분이어도 ‘공개 연애’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위험한 일이었구나. 다시는, 다시는 경솔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멋쩍은 웃음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내가 연주 씨를 정말 좋아하잖아. 예쁘고, 야무지고.”
대화의 흐름이 확실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때였다. 그녀와 나의 관계를 아주 친밀한 사이로 보긴 어려웠다. 자주 연락하지도 않았고 분기마다 한두 번 정도, 그나마도 업무에 대해서만 간간이 용건만 짧게 얘기하곤 했던 사이였다.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오늘의 갑작스러운 통화는 더욱 놀라웠던 참이었다. 하지만 설마.
“정-말 괜찮은 사람이 있어.”
혹시나, 했던 미심쩍음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충분히 거절할 수 있을 만한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음에도 ‘저-엉’에 강조를 둔 그 말은 나를 압도했다. 이후로 쉼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빠른 대화에 나는 웬일인지 어떤 판단도, 생각도 골몰할 수 없었다. 예…, 아뇨, 아뇨, 괜찮아요.
하여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확정된 소개팅이었다.
서른몇 해를 사는 동안 소개팅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여태 소개팅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한 달 전 친한 친구가 주선해준 소개팅도 세 번의 만남 끝에 흐지부지 끝났다. 그토록 외롭고 연애가 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님의 제안이 불편하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 인연은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른다. 솔직한 말로 ‘자만추’라는 말은 얼마나 기괴한 말인가. 인위적인 만남이 오히려 인연을 찾기에 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몰라. 특히나 우리 같은 나이대라면.
협력사 대표님이 카톡으로 보낸 소개팅 상대에 대한 정보를 나는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녀 사촌 동생의 베프로, 키가 크고 꽤 호감형의 외모를 지닌, 그녀가 보장할 정도로 왕년에 굉장히 인기가 많고 멋있던 사람이었다. (왕년에?) 게다가 그는 뛰어난 학력과 직업을 갖추고 있었으며 요새 아주 중요한 화두인 ‘자가’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것도 핫한 경기 남부 신도시의. 여기까지 보면 그는 나에 비해 아주 뛰어난 ‘스펙’을 지닌 사람으로서 내가 마다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는, 아니 사실상 몹시 위축될 만큼 무진장 아까운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으니 통화 중 그녀는 대화 말미에 다만 그가 나보다 나이가 ‘좀’ 많다는 점을 흘리듯, 그리고 아주 재빠르게 지나치듯 말했는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내가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몇 살이신데요?”
“응, 79년생이야.”
칠구 년. 칠구 년.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연예계 대표 클럽에도 그 유명한 칠구 클럽이 존재했지 않았던가. 박경림, 성시경, 이수영, 이효리, 강타. 그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때가 이천 년대 초반이고, 내가 H.O.T. 와 결혼할 거라 외치며 ‘승호부인’을 닉네임으로 설정했던 것이 초등학생 때임을 고려해보면, 그들은 늘 내게 너무 까마득한 존재였다. 팔팔 년생인 내 나이에 아홉 살을 더해보면 마흔셋이었다. 마흔셋.
벌써 79년생이 마흔셋이구나. 어머, 강타 오빠가 벌써 그렇게 됐구나, 하면서도 79년생이 나의 소개팅 상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더 놀랍고 착잡했다.
잠시 정신이 혼미했지만, 얼마 전 윤계상의 결혼이 화두에 올랐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맞아, 장첸! 그 매력적인 장첸, 윤계상도 마흔셋이었다. 윤계상이 대시하면 안 넘어갈 동년배 여자가 어디 많겠나. 편견을 갖지 말자. 게다가 내 나이도 벌써 서른넷이 아닌가.
미안한 마음 약간, 질투를 바라는 마음 약간, 혹은 무언가 이 관계가 전환되는 계기가 되길 바랐던 건지 모를 복잡한 마음으로 아무튼 나는 예정되어있던 소개팅에 나갈 것임을 굳이 ‘그’에게 전달했다.
- 정말 즐거운 시간이 될 수도 있잖아요.
?
여지없군. 예상했지만 그는 역시 태연했다. 잘 만나고 오란 어이없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허 참, 어이없네, 진짜.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래 잘 알았다. 이렇게 나온다면야 나도 당신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토라짐인지, 오기인지 나는 잠시 그를 완전히 제쳐두고 소개팅 상대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 내일 여섯 시, 종각역 앞 한정식집 예약해두었어요. 내일 봬요.
아쉽게도 열 장 남짓한 카카오톡의 프로필에 소개팅남의 얼굴은 없었다. 여행지에서 찍은 풍경이나, 유명한 그림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이것만으론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정확한 소개팅남의 깔끔한 문자는 내일의 만남이 아주 최악은 아닐 거란 안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예약도 확정 지었으니, 지난번 ‘칼국숫집’과 같은 이변은 없을 터였다. 그래, 진짜 괜찮을 수도 있어. 그 사람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어. 한 번 만나보자.
그날의 소개팅은, 내가 여태 겪어온 소개팅과,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소개팅 이미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하자면 ‘전형적인 소개팅’, ‘소개팅의 정석’이었다. 일단 장소부터 상견례에 적합할 듯한, 아주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이었다.
“저, 서연주인데요.”
“아 네, 일행분 미리 와 계십니다.”
아직 약속한 시각이 되려면 십 분이 남았는데, 그는 더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데스크에 또박또박 내 이름을 말하자 단정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곧장 그가 있는 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상대가 누구 건 간에 첫 만남은 늘 긴장되고 떨리기 마련이니까.
“아! 안녕하세요.”
대표님의 평은 과연 정확했다. 키가 크고 왕년에 정말 멋있었을, 하지만 윤계상은 아닌 칠구 년생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고 떨림은 금세 사그라졌다. 나는 사뭇 명랑하게 인사하며 자연스레 그와 마주한 자리에 앉아 찬찬히 그를 살펴보았는데, 아무래도 첫인상에 시선을 끈다거나 여자에게 호감을 주기엔 어쩐지 부족할 순 있어도 흠잡을 만한 단점은 없었다. 사십대로 보이긴 했어도 예민해 보이지도, 고집이 느껴지지도 않는 편안한 인상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들은 대로 그는 명문대를 나와 무려 여의도의 건실한 금융회사에 과장으로 재직 중이었으며 동탄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만일 그가 그것에 대해 은근한 과시를 했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랑을 하려 했다면 ‘허세 감별사’인 내가 그것을 단숨에 포착하지 못할 리 없었을 터. 다행히 그는 자만이 느껴지지 않는, 겸손함을 갖춘 사람이었고 그것은 그것대로 아주 뻔한 의문을 가져왔다.
왜 아직 싱글인 것인가.
늘 내가 깨어있는 사람이라 자부했건만, 이런 의문이 절로 드는 것을 보면 나 역시 가끔은 무례한 보통의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어지간히 눈이 높아서? 사실 첫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치명적인 하자가 있어서? 그는 눈치가 제법 빠른 사람이었다. 내 마음속 질문을 간파한 듯이 그는 어렸을 적 오래 연애했던 여자와의 이별에 따른 트라우마와 함께 그 후로 오랜 기간 연애하지 않았음을 고백하였고, 잠시 민망한 분위기의 침묵이 이어졌기 때문에 나는 아, 그런가요? 라며 그런 의문을 전혀 품어보지 않았다는 듯, 절대 속마음이 들킨 건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앞에 놓인 반찬 무엇인가를 우적우적 씹었다.
아무튼 그 이야기를 제외하면 시종일관 대화는 술술, 아주 매끄럽게 진행됐다. 회사, 재테크, 주식, 코인, 문학 얘기까지. 우리 나이와 관계에 걸맞은 대화 주제가 있었고, 정갈하게 코스로 나오는 음식은 맛있었다. 그것들과 어울리는 술도 한 잔 시켜 함께 마셨다. 모든 것이 나쁘지 않았고 함께 보낸 세 시간의 시간은 의외로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명확하게도 그것이 호감으로 이어지진 않았음을, 나는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마저도 전형적인 소개팅의 풍광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일어나실까요?”
그와 나의 동선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지하철역 앞에서 나는 그와 헤어졌다. 아, 저는 이쪽으로 갈게요. 무례해 보이지 않기 위한 경계심을 거두지 않은 채로, 미소를 잃지는 않으면서. 그도 나의 불편함을 단번에 알아차리곤 꾸벅 인사했다.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어쩐지 고단하고 울적했다.
선호하지 않지만 삼십 대 들어 몇 번 있었던 소개팅은 거의 이런 결말이었다. 인위적인 만남 후 찾아오는 공허함과 울적함이라는 후폭풍. 내가 상대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없을 때, 그 공허함은 더욱 배가 되었고, 상대방이 내게 호감이 있다 싶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내게 미안함과 함께 울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호감이 없음을 정중히 나타내고 상대의 마음을 거절해야 하는 데에서 오는 미안함과 부담감. 몇 번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이런 인위적 만남의 후폭풍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음에도, 외로움과 막연한 걱정은 나를 또다시 인위적 만남이란 구렁텅이로 밀어 넣곤 했다.
오늘은 좀 더 이상했다.
‘썸녀가 그랬는데, 저는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하더라구요.’
나 참, 오늘같이 ‘정석 만남’을 준비한 사람에게도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집에서 막 나온 편한 차림으로 저런 싱거운 말을 던지며 슬쩍 웃던 그가 떠오르는 건 대체 무어란 말이냐.
우연인지 필연인지, 괜스레 마음을 어지럽히게 하는 카톡이 온 건 그때였다.
- 재밌게 노는 중?
그였다.
- 말도 잘 통하고 음식도 맛있고 다 좋았어요.
- 거봐 괜찮을 수 있다니까요.
- 음,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이것이 그가 아닌 다른 남자의 연락이었다면, 호오, 얘 봐라? 괜히 태연한 척하네, 짜식.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었을 테다. 만남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굳이 먼저 온 연락, 응원의 메시지는 아니지만 괜히 찔러보는 듯한 내용. 이만하면 뻔하지 않나. 그러나 모자와 트레이닝복, 면치기, 지나치게 평범했던 카페와 칼국숫집, 그리고 화장실 거울에 비추었던 내 얼굴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앞서 온 메시지도 함께 공격에 가세했다. 그게 아닌가. 어쩌면 정말 아닐지도 몰라. 왠지 아까보다 좀 더 울적해진 것도 같았다.
- 저는 캠핑 중이에요. 가평에서. 여기 사람들이랑 맥주 한 잔 하고 있어요.
- 저도 한 잔 했어요. 소개팅하면서.
- 하하 역시 재밌었나 보네요
- 둘이서 딱 한 병만 마셨어요.
- 부족하면 가평으로 2차 오면 되겠네요.
- 2차요?
캠핑이 취미라는 건 그의 피드를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메시지와 함께 온 캠핑장과 음식 사진이 증명하듯 그는 정말로 캠핑의 낭만을 제대로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 보였다. 그나저나 나더러 2차 하러 가평까지 오란 저 싱거운 말은 진심일까, 장난일까. 아까는 소개팅 잘하고 오라더니, 이젠 가평을 오라고? 진짜야, 뭐야, 매번 싱겁게.
- 2박이에요?
- 네. 1박은 설치하고 철수하기 바빠서.
아무리 장난으로 꺼낸 말이라 해도, 미안하지만 오늘 같은 기분엔 나도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결코 없었다. 왠지 집요해지고 싶었다.
- 진짜 갈까요?
- 네 오세요.
- 내일 일 끝나면 5시예요. 끝나고 갈까요?
- 그럼 차를 가져오지 말고 가평역으로 올래요? 갈 땐 데려다 줄게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장난 같은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던 건지, 소개팅 후 불어오는 후폭풍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건지, 누구에게라도 이 울적한 기분을 위로받고 싶었던 건지, 낭만 있는 캠핑장,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캠핑 음식에 유혹당해 나도 한 번 겨울 캠핑을 맛보고 싶었던 건지.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 내일은 일 끝나고 뭐하시나요?
- 저 내일 가평에 놀러 가요.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소개팅남의 문자에 나는 몇 초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답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눈치 빠른 소개팅남에게서 아마도 이다음 답장은 오지 않을 터였다.
운 좋게 난 자리에 앉자마자 지칠 대로 지쳐 쏟아지는 피로로 가뭇가뭇 눈이 감겼다. 마음을 심란하게 어지럽히던 생각들은 가만 스러지려 하고 있었다. 혹시, 지금 이 순간 가평까지 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그가 보고 싶은 걸까. 글쎄, 그것도 잘 모르겠다. 울적함과 허망함, 그리고 모호한 감정들은 여전히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고, 나는 다만 한 가지만을 확신하고 있었다. 내일 같은 시각에 나는 의정부가 아닌, 가평에 있을 거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