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겪는 신선함이었다. 장난 같은 마음에서 시작했던 ‘그것’은 점점 ‘진짜’가 되어가고 있었다. 발목까지 오는 두툼한 니트 원피스 위에 털모자가 달린, 넉넉한 사이즈의 두꺼운 롱 패딩을 챙겨 입고, 혹시 발이 얼까 싶어 털신까지 쇼핑백에 담아 챙겨 나왔다. ‘예랑이가 캠핑장 오라는데 이따 상황 봐서 가면 가고.’라고 <깐부들> 단톡방에 마치 ‘나는 관심일랑 없지만, 그냥 시간 맞으면 한 번’ 가보는 척, 제법 시니컬한 척 보내 둔 메시지와는 다르게 사실 잠도 설쳐가며 아침 일찍부터 제대로 준비해 나온 터였다.
- 뭐 안 사가도 될까요?
- 진짜 빈손으로 와도 돼요. 어제 너무 많이 사 와서 양이 많아요.
상봉역에 앉아 경춘선이 오기를 기다리며,내가 자신을 예랑이라 칭하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을 그와 나눈 카톡 메시지를 보고 있으니 우습게도 이제야 그와 함께 있다는 그의 지인 둘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날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할까. 그들이 나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전해 들었다면 동료와 고작 한 번 만났던 여자가 몸소 가평까지 가는 이 기괴한 상황을 알고 있을 테고, 모른다고 하더라도 누가 봐도 친한 친구가 아닌 어색한 사이로 보일 텐데 둘 중 어떤 상황이든지 역시나 ‘기묘한 이야기’로 보이긴 마찬가지일 테였다.
아 창피해.
돌아가?
지금이라도 돌아가 버려?
- 이제 출발하나요?
이 선택이 잠시 내 커다란 불찰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와 번복하는 것도 우스운 꼴인 건 매한가지였다. 됐다. 어차피 뭐가 돼도 웃긴 거라면 차라리 진짜 재밌게 놀고 오기라도 하지, 뭐. 캠핑 가고 싶어 했잖아. 괜찮아, 서연주. 때마침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고 네, 상봉에서 지금 타요.라는 메시지 전송과 함께 나는 얼른 경춘선에 몸을 실었다.
“어디세요? 저 가평역 도착했는데.”
“차 안 보여요?”
“잘 안 보이는데, 어디예요?”
빵.
“여기 주차장. 이쪽으로 쭉 걸어오세요.”
클락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멀리 창문을 내린 채로 비상등을 켜고 있는 차 한 대가 보였다.
상봉에서 한 시간이나 걸려 가평역까지 올 때까지도, 도착해서도 뭔가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역 앞에 마중 나와 있던 그의 차를 본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뭔가 이상함이 훅 끼쳐왔다. 말하자면 어딘가고장 난 느낌이랄까.
“안.. 녕하세요.”
삐걱삐걱.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허둥대며 그의 차에 올라타 겸연쩍은 인사를 건넸다. 이보다 더 어색할 수 있을까. 벌써 한 번은 만났던 데다가 그 이후로도 수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것이 무색하게 나는 어색함의 끝을 보고 있었다. 첫 만남일 때랑은 다르게 왠지 그를 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눈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박동 속도도 빠르고 심장 소리도 커진 느낌이었다. 바로 전 첫 만남에서도 이러지 않았는데. 익숙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까닭인지, 어제 만난 소개팅남의 영향인지, 첫 번째 만남 이후 내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건지 몰라도 정말 이상했다. 머릿속에 꼬인 실타래가 들어앉은 느낌.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힐끔 옆을 보니, 이런 내 혼돈을 알 리 없는 그는 역시나 모자에 트레이닝복, 플리스 재킷을 걸쳐 입고 있는 것이 어째 그날보다 훨씬 더 편하고 추레해 보였다.
하지만 왠지 그도 기분이 좋아 보였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많은 말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엷은 미소를 띤 채로 두 번 째니까 말 편히 해도 되지, 라며 말을 놓고선 지난번보단 확실히 나를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입으면 추울 텐데.”
캠핑장에 오는데 도대체 어떻게 치마를 입고 올 생각을 했느냐, 산이라 얼마나 추운데, 이따가 바지를 줄 테니 입고 있으라며 그는 나를 타박했고, 나는 ‘아이, 치마가 더 따뜻하다니까요.’라며 말도 안 되는 대꾸로 그의 타박을 받아치면서도 그것이 나름의 꽤 호의적인 ‘관심’이라 생각돼 싫지 않았다. 대화가 잠시멈췄을 때도 그는 빙긋 웃음을 짓거나 몇 번 작게 웃곤 했는데, 아마도 내가 진짜 가평까지 온 것이 신기하고 재밌는 듯해 보였다. 물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이것이 실제가 맞나, 하는 벙벙한 기분이 계속되고 있었다.
캠핑장까지는 약 이십 분 정도. 긴장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달리고 있음에도, 그 분위기가 딱히 싫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아니, 사실상 설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오히려 이 순간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한참 더 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기대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내가 여길 오는 게 맞았나, 하는 생각이 든 건 캠핑장에 도착해서였다. 갑자기 막 꿈에서 깬 것처럼, 그곳에 있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두 명의 그의 동료들을 본 순간 현실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아, 내가 너무 섣불렀어. 당황한 것은 나보다 그들일 게 분명했다. 친절하지만 어색한 미소와 표정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 크고 밝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들도 어색하게나마 밝(아보이)게 화답했다. 그들에게 최대한 예의 있게 도울 것이 없냐는 식의 말을 건네어 봤으나, 그들은 깜짝 방문한 게스트를 배려하는 친절한 호스트로서 내게 단지 편하게 머무르고 즐기다 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잠깐 이리 와봐.”
이거 입고 나와. 나를 텐트로 데려간 그가 한마디 말과 함께 바지를 건네주곤 곧바로 나가 텐트의 문을 잠가주었다. 바지를 입기 전 몇 초간 짧은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다. 괴상해 보이는 패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사이도 아닌 외간 남자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아무리 다수의 연애 경험이 있는 삼십 대 중반의 여성에게도 왠지 모를 쑥스러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니트 원피스 안으로 벙벙하게 큰 남자 바지, 털신을 신은 괴상한 차림으로 잠시 서성이다 슬슬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왔는데, 나의 쑥스러운 발걸음이 무색하게 아무도 내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들 바지런하게 요리며, 정리며 각자 맡은 바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부여받은 역할이 없으니 별수 없이 화로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서먹하게 앉아있는데 이번엔 민망함이 몰려왔다. 못 올 데를 온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지인, 그 역시 바빠 보였다. 부산스레 움직이며 이것저것을 옮기고 준비하느라 의자에 홀로 가만히 앉아있는 내게 눈길을 두지 않았다. 별다른 할 일이 없어 캠핑장 경관이며, 화로 테이블에 올려진 준비된 몇 개의 음식 사진을 찍으며 핸드폰을 만지다 문득 왼쪽 팔과 다리에 온기가 와닿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난방기구를 내 쪽으로 향하게 하는 그가 있었다. 생각보다 따뜻했다. 자그마한 난로였는데 썰렁한 공기를 금세 덥힐 만큼 요긴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그는 말없이 작은 난로 하나를 더 설치해 그것 역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놓곤 핫팩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쥐여주더니 금방 다시 어디론가로 향했다. 나참, 장난기만 많은 줄 알았더니 이럴 땐 꽤 다정함이 있네.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춥죠?”
그의 동료 중 남성인 지인이 어느새 내 옆자리로 와 앉아있었다.
“아니요, 너무 따뜻한데요. 갑자기 제가 와서 놀라셨죠.”
“아뇨. 미리 오신다고 얘기 들었어요. 괜찮아요.”
그의 동료는 친절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애써 참아내고 있는 민망함을 그 역시 깊숙이 숨겨주려는지 그는 전혀 불편한 내색 없이 대수롭지 않은 듯 굴었다. 사뭇 호의적이라 느낄 만한 표정과 말투였다.
“종오 씨가 하도 캠핑이 재밌다고 얘기를 많이 해놔서요. 궁금해서 제가 졸랐어요. 한번 가고 싶다고.”
“네. 둘 다 캠핑을 좋아해서 종종 같이 다니는 사이예요.”
“아, 근데 종오 씨가 저 어떻게 아는 사이라고 했어요?”
“어, 뭐, 그, 그. 걔가 자기 얘기는 잘 안 해요.”
이렇게 곧장 본론을 꺼낼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던지 난감함을 숨기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말하는 그의 답을, 나는 알아서 걸러 들었다. 무어라 말을 하긴 했겠구나. 하지만 사실 지인에게 나를 어떻게, 어떤 사이라 소개했을지 궁금하기도 했으므로, 그의 모호한 답은 내게 퍽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도 인스타로 만나서 딱 한 번 본 사이라는 건 아시겠죠.”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얼마나 알고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기습적으로 자폭 같은 말을 던지곤 웃었는데, 그와 나의 ‘기묘한 관계’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호감을 애써 모르는 척 눈감아 주려던 동료의 예의 바른 친절한 눈빛이 이내 당혹감으로 바뀌어 흔들리는 것을 나는 포착하고야 말았다. SNS를 통해 만나서 첫 만남엔 차가 견인되더니, 두 번째 만남엔 캠핑장에 온 여자. 아마 그에게 푹 빠져있거나, 원체 골 때리는 엉뚱한 여자라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둘 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어색함을 깨는 방법으로 술 한잔보다 더 탁월한 것은 없었다. 몇 마디의 농담이 왔다 갔지만 아직 살짝 얼어있는 분위기를 깨기 위해 동료는 술을 권했다. 위스키랑 소주, 둘 중 어떤 걸 드실래요?, 나는 글렌피딕을 택했고 그는 위스키 잔은 없다며 대신 기다란 플라스틱 컵에 술을 따라주었다. 한 번에 따라드릴 테니 조금씩 드세요, 라는 말과 함께.
반갑습니다. 서로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씩 술을 들이켰다.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이내 팽팽하게 긴장했던 몸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설치해둔 난로와 위스키 한잔, 그의 동료의 따뜻한 환대로 캠핑장의 어색한 공기 역시 어느새 훈훈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바삐 움직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몰래 슬쩍슬쩍 그를 눈으로 좇아보면 어느 순간엔 쪼그려 앉아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엔 무언가를 옮기고 조작하면서 아무튼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작은 한 조각이지만 처음 경험하는 겨울 캠핑은, 생각보다도더욱 좋은 느낌이었다. 십일월 초겨울답게 난로의 온기가 닿지 않는 몸 곳곳이 느끼는 밤공기는 꽤 찼지만 청량했다. 그 사늘한 상쾌함은 내게 낭만이랄까, 기분 좋은 흥분이랄까 하는 설렘을 안겨주고 있었다.
짠. 그를 대신해 그의 동료와 한 번 더 잔을 부딪친 그때,
어느새 내 앞으로 와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처음 보는 낯선 물건에 뜨거운 물을 담고 있었다. 아마도 온수 팩 같은 기능을 하는 물건인 듯했다.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저런 물건으로 찜질을 해줬던 기억이 있는데…, 하며 잔을 든 채로 잠시 어렸을 적 추억에 잠겨있던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별말 없이 그는 씩 웃어 보였다.
어라,
이러면 안 되는데.
<깐부들> 중 한 명이 주선해준, 아직 하지 않은 소개팅이 사실 하나 더 남아있었다. 단 두 번 만난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이 없었다. 게다가 SNS를 통해 알게 된 사람, 보장된 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진심으로 어떤 목적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다. 완전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재미 삼아 나왔다고, 나는 그런 굳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춥고, 어둡고, 낯설지만 설렘이 있는,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 마치 새로운 여행지에 온 듯한 분위기여서? 그의 전 썸녀들이 인정했듯, 그의 웃는 입매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난로며, 핫팩이며 그가 나를 위해 손수 챙겨주는 물건들이 감동적이어서? 한순간, 마치 잘 짜인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