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여긴 어디, 몽롱한 정신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왠지 뻑뻑한 눈을 몇 번 끔뻑거리자 하나하나 차례로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낯익은 천장이, 그 옆으로 벽에 걸린 ‘오늘의 집’에서 구매한 싸구려 해바라기 액자가, 그 앞으로 잠옷들과 샤워가운을 걸어놓은 행거까지. 아무튼 지금은 내 집 침대 위가 분명했다. 꿈을 꿨었나, 뭐지. 이상하게 아득히 멍한 기분이 들더니만 무언가 익숙지 않은 물체가 오른쪽 눈 가장자리 시야에 잡히는 듯했다.
침대 옆쪽으로 파란 바지가 곤충이 벗어놓은 허물 마냥 널브러져 놓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벼락 맞은 것처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맞다, 나 어제…! 가평에 갔던 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침대 옆에 널브러진 파란 바지가 ‘어제의 일’이 실재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근데 내가 왜 여기에?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심장은 분명 왼쪽 가슴 안에 있을 텐데, 심장박동 소리가 거대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울리고 있었다. 큰일이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그의 지인과 위스키 두어 잔을 마신 후 다 같이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 건 기억이 나는데, 찹스테이크, 파스타를 연달아 먹으면서 나름 재밌게 그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여러 대화를 나눴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보려 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그 후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집까지 오게 됐단 말인가.
머릿속에 뿌옇게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 기억이 나지 않더니만 점차 드문드문 몇 개의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아니 어쩜 화가 나 보이기까지 하던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던 그의 옆모습과, 우리 집에서 부리나케 뛰쳐나가던 그의 뒷모습.
우리 집에서…?
나 미친 거 아냐…?
대체 뭐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첫 만남엔 견인이 되더니, 두 번째 만남엔 한 시간 만에 만취해서 기억을 잃고야 말았다. 게다가 우리 집에서 뛰쳐나간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그 앞뒤 자초지종을 떠올려 낸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가평역에서 캠핑장까지 가는 차 안에서, 집으로 함께 돌아오는 길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설렜었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망가져 버린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말 확인하고 싶진 않았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었지만,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침대 위를 더듬거려 오른쪽 허벅지 옆쪽에 놓인 핸드폰을 찾아냈다.
- 보낸 메시지: (오전 12:20) 흠
- 보낸 메시지: (오전 12:24) 7시 이후 안 돼요! 그럼 (웃는 이모티콘)
- 받은 메시지: (오전 1:07) 저는 이제 씻고 누웠어요 낼 연락해요!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누가 봐도 만취한 게 분명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유추할 수조차 없는 내용의 내가 보낸 정신없는 카톡, 그리고…, 어제부터 분명 말을 놓은 것이 명확히 기억남에도 불구하고 아주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존대어로 온 그의 답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신이시여, 제발.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SNS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고, 우연히 연락하게 되어 만난 사람과 연애할 생각은 갖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보장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추호도,라고 말할 순 없어도 진지하게 만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좋은 친구가 되면 좋고, 그게 아니라도 좋은 시간을 보내면 만족할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가평까지 가면서 어떤 설렘도,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서른넷이라는 나이, 허투루 먹은 게 아니라면 그 설렘이 사랑으로 꼭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리 있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분명하게 ‘반했다’고 여겼던 때가 바로 어제였지 않은가. 이 관계가 이런 식으로 와장창 깨지리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삼십사 년간 쌓아온 나의 빅데이터는 내게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의 연락은 오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은 단지 유예기간일 뿐인 게 분명했다.
- 오빠.. 어제 너무 피곤해서 취했나 봐요 미안해요
저 원래 이런 사람 절대, 절대 아니고요. 진짜 두 번째 만남에 이러는 건 저도 정말 농담 아니고 처음이고요. 만취해서 정말 죄송하고요. 면목이 없고, 친구들께도 정말 죄송한데…, 그런데 저 진짜 이런 사람 아니에요!!! 정말 억울한데,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오해도 풀고 만회할 기회를.
긴말로 나의 억울함에 대한 해명을 보내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누르고, 간결하게 미안함만을 담은 메시지를 전송한 후, 나는 핸드폰을 이불 위로 던져 버렸다. 답장이 오는 것과 안 오는 것. 어느 편도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차는 회사에 주차되어있었다. 만취한 다음 날이 으레 그렇듯, 천근만근 무거운 머리를 어렵게 지탱한 채로, 몰골은 추레하게 말이 아닌 채로,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컨트롤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는 동안에도, 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고 있었다. 오전 여덟 시, 아무리 캠핑장이라고 해도 아직 자고 있어도 무방한 시간이겠지,라고 자위하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속은 좀 괜찮아요?
대박.
살았다…!
속이 괜찮냐는 그의 답장이 온 건 출근하고 약 삼십 분 정도가 지난 아홉 시 반 경이었다. 생각보다 차가운 말투도, 딱딱한 말투도 아니었기에 나는 크게 안도하며 냉큼 답을 보냈다. 여유롭게 답장의 텀을 생각하며 밀당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 네 오빠.. 죄송해요. 어제 따뜻하게 먹어서 취했나 봐요
- ㅋㅋㅋ 괜찮아요
- 그래요 오빠 캠핑 잘 마무리하세요!
- 응 이제 철수한다 이따 연락할게!
하지만 철수를 마무리하고 퇴소했을 시간이 지나고, 동료들과 점심이라도 함께 먹었을 가능성이 있는 시간도 지나고, 그들을 각각의 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와 장비들을 정리하고, 씻고, 쉴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리고 내가 제정신이 아닌 채로 퇴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까지도 그가 연락한다는 ‘이따’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그동안 지옥의 시간을 보냈다는 건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를 미친 듯이 사랑한 것도 아니고, 진지한 고백에 매정하게 거절당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마치 실연당한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괴로웠다. 기억나지 않는 나의 어떤 행위로 인해 나는 손절당한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이 어이없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눈물까지 나오는 지경이었다.
나는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지난날 나의 최악의 주사(酒邪)를 떠올려 봤을 때, 약 세 가지 정도의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1. 계속해서 술을 더 달라고 했다.
아주 크게 취하지 않았어도 가능한 시나리오. 사람들과 자리가 즐거우면 더더욱 발현되는 상대적으로 기본적인 주사. 누가 봐도 얼큰하게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안 취했음을 강조하며 한잔 더, 를 외치며, 조금 더 심하게 취했을 경우 고집을 부리며 정색까지 하기에 술자리 분위기가 망가질 수 있음.
2. 울었다.
섞어 마셨든지, 평상시 안 마시는 주종을 마셨든지, 아무튼 일 년에 한 번쯤 거나하게 취했을 때 발현되는 주사. 신세 한탄이나 이미 다 해결된, 지난 과거에 상처받은 얘기들을 반복적으로 하며, 상대에 따라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정떨’이 될 수도 있음.
3. 고백했다.
.. 그만 얘기하자.
세 가지 전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것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마신 술의 양이 상당해서 아직 깨지 않은 걸까.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박동은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던 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철수하고 연락한다더니, 철수하고 연락한다더니…!
어찌나 고통스럽고 괴로웠던지, 혼자서는 도저히 이 괴로움을 감당할 수가 없어 나는 가장 친한 남사친인 L을 포함해 열 명, 아니 거의 스무 명이 넘는 다양한 친구들에게 이 상황을 토로하고 그의 심정을 추측해달라고 읍소하기에 이르렀다. 한동안 잠잠해 죽어있던 단톡방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얘들아 안녕, 잘 지내지? 그런데 내 고민 좀 들어줘.’라며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무례한 안부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아무튼 상황을 들은 친구들은 내게 세미 ‘썸남’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할 새도 없이 벌써 비극에 다다른 나의 상태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대부분 부정적인 결론이나 가망이 없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특히 나의 주사를 겪어본 친구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식으로 더욱 담담했고, 그들과 나와의 관계가 친밀할수록 판단과 조언의 냉정함은 훨씬 짙어졌기 때문에 나의 절망감은 극에 달했다.
<깐부들> 방에서 Y는 내게 [남자가 당신에게 연락하지 않는 이유],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따위의 어린 학생들이나 볼법한 진지한 블로그 글을 보내며 심심한 위로를 전했고, 다른 몇몇 짓궂은 친구들은 내 기분을 풀어준답시고 ‘you were a car already.’와 같은 농담들을 건넸는데, 표현 방식은 각기 달랐어도 내가 꼭 쥐고 있던 실낱같이 가는 희망의 끈을 가차 없이 끊어냈다는 점에선 꼭 같았다.
아주 친하지 않은 한두 명의 착한 친구들만이 글쎄, 잘 모르겠다며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최대한 빠르게 감아보고자 잠을 청했으나, 괴로운 심정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으므로 나는 눈을 뜬 채로 마치 지옥에서 견디는 듯한 심정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새벽 내내 잠은 깊이 들지 않았다. 몇 시간쯤 지났겠지, 싶으면 단 십 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있었고, 꿈인 듯 현실인 듯 모호한 경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무의식을 반영한 파편적인 장면들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떤 장면에선 핸드폰에 그의 이름이 뜨기도 했고, 어떤 장면에선 그와 카톡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퍼뜩 눈을 떠보면 그것은 꿈에 불과했고, 동이 트려면 아직은 먼 새벽이었으며, 여전히 그에게선 어떤 연락도 없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채 아침이 되고 다시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각에 다다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어제 전화했더니 계속 통화 중이더라. 집에 와서 바로 잠들었어. 속은 좀 괜찮았어?
순간적으로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오른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면 뛸 듯이 기뻤다, 라는 말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 아닐까. 술자리에서 한 기억나지 않는 실수가 답장이 영영 안 올 만큼, 그러니까 아주 지나친 주사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내 이미지가 그렇게 망가지지 않은 것 같아서, 남자한테 먼저 손절당하지는 않아서.
아니,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연락할 때, 그리고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들. 이를테면 긴장, 설렘, 호기심, 그 외에 여러 기분 좋은 감정들. 그리고 만 하루 동안 그와 연락하지 않으며 느꼈던 감정들. 우울함, 공허함, 허전함, 그리고 불안함을 떠올려 보면,
분명하게 이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계속해서 좋아하는 이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으므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안도와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이 몰려오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몇 번이고 몇 분이고 그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