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우 Sep 07. 2024

백수가 되었습니다.

Entj 직장생활

어제부로 백수가 되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어제 퇴사 의사를 팀장님께 밝혔다. 빠르면 몇 주내, 늦으면 한두 달 내로 나는 백수가 될 예정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어언 십 년. 대학원까지 포함하면 12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쉼 없이 달려왔기에, 백수가 되는 것이 허탈함 40%, 설렘 40%, 걱정 5%, 두려움 5%, 기타 등등의 감정 10%로 온갖 감정들이 교차한다.


어디서부터 실타래가 잘못 꼬이기 시작한 건지...


회사는 작년부터 크고 작은 희망퇴직을 진행해 왔고, 350명에서 150명으로 인원을 줄였을 때도 살아남은 나였는데 내 발로 걸어 나가게 될 줄이야.


그 당시 팀장님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솔직하게 말할게. 내가 봤을 때, OO은 팀원과 결이 너무 달라. 지금 회사는 영업팀에 오직 발로 뛰는 말이 되길 바라는데, 기획은 영업기획에서, 상품은 상품기획에서, 마케팅은 마케팅에서 할 테니, 영업은 그냥 무조건 팔아라 이런 스탠스란 말이야. OO이 지금 하던 것처럼 기획력 이런 거 발휘 못하게 손발 묶어버리고, 생각 없이 매출만 내라고 할 텐데, 그거 가능해? 불가능하잖아."


그때는 나를 자르기 위해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아뇨,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답을 했었다.


근데 역시 팀장님들은 참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나도 내가 나이도 좀 먹었고, 직장 짬밥 10년이니 월급 따박따박 받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좀 내려놓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막상 내가 생각했을 때 영 아닌 것들을 하려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거다.


일단, 몸이 아프다. 처음엔 면역력이 떨어졌나 싶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하기 싫은 걸 해야 하니 몸이 아프기 시작했던 거다. 회사만 출근하면 뱃속이 더부룩하고 방귀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다 주말만 되면 또 멀쩡해진다. 어쨌든 아픈 것을 치료하기 위해 한약에만 150만 원 쓰고, 한약이 나를 낫게 한 것인지, 아픈 몸 치료하겠다고 회사 일을 좀 내려놓은 탓인지, 2개월 뒤엔 씻은 듯이 치료되었다.


둘째로, 홍조가 생겼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entj라 그런지 할 말을 하지 않으면 병이 생기는데, 거지 같은 기획안을 보고 거지 같다는 말을 못 하고 참으려니 얼굴과 머리에 열이 계속 났다. 난 이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산책을 하고, 요가를 시작했지만, 가라앉는 건 그때뿐, 회사 가면 또 열이 뻗쳤다.


마지막으로 돈을 많이 썼다. 회사 일을 잊기 위해 여행을 가고, 회사 일에 대한 보상으로 쇼핑을 하고. 이러다 거덜 나겠다 싶을 때, 일이 터졌다.


사실 별것 아닌 일이다. 그냥 참고 참았던 내 머릿속의 퓨즈가 한순간에 끊어졌을 뿐.


그렇게 퇴사 결심을 하고, 회사에 통보하고.

오늘은 그다음 날.


아, 머리가 매우 맑다. 세상이 다시 보인다.

역시 사람은 본인에게 맞는 환경에서 일해야 한다니까.

이러고 다음 달엔 후회할 수도 있다.


연봉도 높고, 복지도 좋고, 집에서 10분 거리의 회사였으니까. 아악.


하지만 entj의 내게 뒤돌아보는 일 따윈 없다. 오로지 전진만 있을 뿐. 내일은 앞으로 머 먹고살지 고민 좀 해봐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희망퇴직 대상자가 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