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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Nov 26. 2023

공공기관 아니야?

임시 영주권으로 가는 길 1

  이른 아침 커다란 가로수 사이로 내리는 볕을 가로지르는 도로에 출근하는 차들로 붐볐다.

  드디어 SSN 카드를 신청하러 가는 날. 늦게 가면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일찌감치 R과 함께 집을 나섰다.


  R은 우리가 함께 살게 되면서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에 풀타임 근무를 한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부터 몇몇 직장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서류합격과 면접을 보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다. 그리고 결과 통보 이후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출근하게 될 줄 알았지만 까다로운 수많은 과정이 더 남아있었다. 어찌어찌 이 길고 느린 과정을 무사히 통과해 R은 새로운 직장에서 성실히 적응 중이다.

  R이 지금 일하고 있는 곳보다 급여와 근무조건이 나은 곳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포기해야 했다. 임시 영주권을 준비하려면 여러 공공기관에 함께 방문해야 되는데 급여와 근무조건이 나은 곳은 평일 고정 근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없이 스케줄 근무를 하는 지금 일하는 곳을 선택해야 했다.

  R이 학기 중에 치열하게 공부하고도 방학 중에 쉬지도 못하는 원인이 나라는 생각에 죄책감과 안쓰러운 마음이 뒤섞여 R이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도록 뭐든 부지런히 하려 노력 중이다.

  이 날도 주중에 하루 있는 휴일에 임시 영주권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나서는 길이었다.

  Social Security Number은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한다면 꼭 필요한 개인 고유 번호다. 은행 계좌를 열거나 취업할 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약혼자 비자로 입국한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눈부신 아침 볕을 가로질러 커다란 가로수 그늘에서 쉬고 있는 노숙자들과 쌍을 이루는 이름 모를 새들을 지나다 보니 금방 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에 도착했다.


  '자기야 저 건물에는 주차장이 없는 거야? 공공기관 아니야?'

  하지만 기이한 일이 벌어졌으니 공공기관에 방문자들을 위한 주차장이 없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해야 할 법한 상황에 기가 막혔다. 도심의 도로 곳곳을 공사 중인 하와이는 공교롭게도 이날 공사를 위해 이 건물 주변에 있는 유료 길거리 주차도 모두 막아 놓았던지라 그 방대한 건물을 3번 이상 뺑뺑 돌아도 근처에 주차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결국 조금 떨어져 있는 대형 몰 유료 주차장에 주차해야 했고 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까지 걸어가야 했다. 1시간 조금 안돼서 업무를 끝내고 오니 10달러를 지불해야 열리는 주차장 바리게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공기관에 업무 보러 왔을 뿐인데 값비싼 주차라니. 아무리 자본주의 끝판왕 미국이라지만 공공기관에 공용주차장이 없는 건 정말 너무하다.


  아무튼 제시간에 맞춰서 왔지만 주차를 못해서 20분 정도 늦어져 발걸음을 재촉했다.

  건물 입구에 도착하니 웬 보안요원들이 이렇게 많은지 공항 검색대에서 볼 수 있는 금속탐지기에 소지품을 제출한 후 X선 검사까지, 공항 출국장에 다시 온 줄 알았다. 하와이는 총기 소지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에도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인지 특히 공공기관 보안을 철저히 하는 것 같다. 공용주차장도 좀... 어떻게.. 안 되겠니?

  R은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했는데 함께 갔던 복실이를 출입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동가방에 있으면 괜찮을 줄 알고 같이 갔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당황했지만,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나와보니 나보다 R이 좌불안석이었나 보다.

  나는 R과 영어로 대화한다. 나는 영어로 R과'만' 대화할 수 있다. 영어로 말은 하는데 오직 한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특수성이 있다 보니 R이 꽤나 걱정 됐던 모양이다.

  하지만 까다로워 보였던 보안요원들은 친절하게 어디로 가야 하는 설명을 해줬고, SSN 발급받는 곳에서는 또 다른 보안요원이 내 대기 번호표까지 다 뽑아줘서 정말 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면서 일찍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내 뒤로도 방문자들이 계속 들어기 때문이다. 한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내 번호가 불렸다.

  은행창구 같이 생겼지만 통유리로 막혀있기 때문에 직원들은 모두 마이크를 사용해서 번호를 호명하고 모니터에도 번호를 띄운다.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는 이 수많은 창구들은 거의 20개가 넘는 것 같았지만 모든 창구에 직원들이 있던 게 아니라 업무 속도가 느렸나 보다.


'Good morning!'  

내 담당자였던 아시아계 여성은 영어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끝까지 친절하게 대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그녀는 필수적인 질문이라며 내게 3개의 질문을 했는데 사실 그녀가 어떤 질문했는지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Have you ever~'로 시작되는 질문들이어서 눈치껏 모두 'No'라고 했다.

  

  'Thank you, have a good day!'

  2주 안에 SSN 카드가 집으로 배송될 거라는 말을 끝으로 인사 후에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객들의 위한 출입구가 오직 한 곳이라서 건물을 들어왔던 입구에 다다르니 엄청난 방문객들의 줄이 보였다. 역시 일찍 오길 잘했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복실이와 함께 서성이고 있는 R에게 다가가 나 혼자 공공기관에서 업무본 일을 영웅담처럼 말해줬다. 문득 친구나 가족 없이 혼자 서울 시내버스를 처음 탔던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대단한 도전이라 긴장되고 설레던.


  이제 결혼 면허증을 발급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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