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다니다 스타트업 가니까 어때?

적당히 살아가는 대기업 이후 스타트업의 이야기 - 3

by 꿀잠

3주 만에 화장실 불이 들어왔다. 2개의 전구로 지탱하던 화장실 불빛은 1달 전쯤 하나가 먼저 가버렸고 애써 버티던 남은 놈마저 10여 일 만에 완전히 가버렸었다. 무드등 기능이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3주 동안 나름의 분위기를 즐기다가 친구가 놀러 오겠다기에 후다닥 바꿨다. 뭔가 그래도 이 나이 먹고 화장실 불조차 안 들어오는 오래된 원룸에 살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노란 무드등에 의존해 씻어 왔던 지난 3주가 머쓱하게도 불은 아주 쉽게 돌아왔다.

뭔가 문득 이제 이런 간단한 일조차 귀찮아져서 불편함에 적응하기 시작했나 싶은 불안감이 들었다. 회사가 월급을 담보로 시키는 하루 약 8시간의 업무로 '난 오늘 모든 에너지를 썼다!'라고 확정해버리고 풀썩 누워버리기 일쑤다. 사실은 이렇게 환해지는 데는 겨우 5분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전등을 바꿔 키우는 만큼이나 또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이 빠르게 지난다는 것은 그 시간에 충실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돌이켜 생각했을 때 대부분 '분명히 엄청 바빴는데 뭘 했지..?'라는 건 또 한편으로 아무 경각심 없이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라서 씁쓸하기도 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지난 2년이 인생 어느 때보다도 힘들고, 열심히 살았으면서도 그 시간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2년들보다 훨씬 짧게 느껴진다는 것은 앞으로의 인생도 이렇게 별다른 추억 없이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듯하다. 계속 이렇게 정신없이 살겠지만 어느 순간 뒤 돌아봤을 때 무엇이 남았나 하는 공허함이 함께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 대기업 vs 스타트업을 가장한 글들은 이 정체 모를 일상 속에서 조금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무언가를 얻어가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이자 발버둥이다. 지난 글에서 다룬 복지는 상당히 정보적인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모두가 말 못 하지만 한번 발 들이면 스트레스의 온상인 '사내정치' 관련하여 다뤄보고자 한다.



2. 대기업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보지만, 스타트업에서는 동료의 눈치를 본다.



엄밀히 말하면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그 정도의 차이지 '동료끼리의 견제', '윗선에 대한 줄' 은 다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 다만 그 비중이 '상사'냐 '동료'냐는 근본적으로 회사의 조직문화에 따라 나뉘는 것 같다. 스타트업을 인턴으로라도 다녀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스타트업의 99.9%는 구글 st의 아주 자유롭고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한다. 대부분 그것을 하루 잡이로 배워와서 문제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겨난 스타트업 문화의 가장 큰 장점은 대표 빼고는 모두 동료인 것 같은 '끈끈함'과 다 같이 겪는 무질서한 프로세스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다져진 '전우애'다. 이게 얼마나 큰 장점이냐면 대학 시절 한 20명 남짓의 스타트업에 인턴 할 때 주 6일 근무, 매일 10 ~ 12시간씩일 할 때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너무 친하고 좋아서 미쳤다고 계속 다닐만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점이 때로는 가장 나쁜 점이 될 수도 있다고. 어떤 요인으로 동료끼리의 견제 및 편 가르기가 심화되기 시작하면 스타트업의 자랑이던 '수평적 문화'는 누구 하나가 굴복하거나 떨어져 나가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치킨게임이 된다. 물론 '수평적 문화'라는 스타트업에도 책 임권자는 필수적이기 때문에 위계질서 정도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 책 임권자 들은 일부 임원급을 제외하고는 아주 약간의 권력과 어마어마한 책임을 가진다. 쥐꼬리만 하게 손에 쥐는 권력조차도 선진국형 인사평가 제도라는 다면평가로 인해 허울뿐인 무기일 뿐이다. 책 임권자의 정당한 지도보다는 부하 직원의 불만이 훨씬 큰 파워를 가지며, 팀 실적보다는 낮은 팀원 평가가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이로 인해 우습게도 스타트업에서는 경력과 능력을 인정받아 경력직으로 입사한 책임권 자보다도 초기 멤버로 오랜 시간 회사와 함께한 이른바 고인물들이 훨씬 큰 힘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대기업은 어떨까. 대기업은 '상사'의 험담으로 동료들을 끈끈하게 만들어 준다. 물론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결국은 그 동료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경우가 생기지만, 아직 사회 초년생들에게 동료는 얼굴만 떠올려도 머리가 새하얘지는 '상사'로부터 조금이라도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버팀목이다. 사실 나도 한 명의 사수를 만나봤을 뿐이고, 업무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존경할 만한 팀장도 만났었다. 사수는 인격적으로는 매우 영악하여 매번 나를 약 오르게 했으나 업무적으로는 너무 빈틈없고 영리하여 배울 것이 많았고, 반대로 그 위 과장은 일은 더럽게 못하면서 생색내는 것만 배웠나 싶을 정도로 자기 공을 잘 챙겨갔었다. 이 두 덕목을 모두 갖춘 사람이 팀장이었고 아 저 정도는 해야 팀장 자리 올라가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며 아직 그래도 사회가 어느 정도는 공정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이렇게 대기업에서는 동료들과는 감정적인 교류 외의 기능이 거의 불필요하기 때문에 커리어적 기능을 위해서는 소위 '줄타기'가 필수적으로 여겨진다. 아직 '줄타기'가 필요한 정도의 위치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1년 정도만 다니더라도 1년에 2번 있는 인사철마다 누구는 줄을 잘 타서 고속 승진을 하고 누구는 한번 잘못 탄 줄 때문에 몇 년째 낙방이라는 소문은 한 번쯤 들어보기 마련이다.


사실 이렇게 대기업은 어떻고 스타트업은 어떻고 라고 나열했지만, 어떤 눈치가 더 힘든지는 알 수 없다. '동료'와의 눈치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되게 업무외적으로 불필요한 스트레스라서 약간 한여름의 모기떼 같은 스트레스이며, '상사'와의 눈치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강압적이지만 업무적으로 내가 넘어서야 할 스트레스라서 높디높은 산을 앞둔 스트레스다.


그렇다면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에서 사람 스트레스는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사람의 성격이란 너무나 달라서 어느 조직에서건 성향 차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회사란 어차피 '일'을 하는 곳이라면 '일'을 잘하는, 무엇이든 배울만한 사람이 있는 곳이 회사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기업보다는 스타트업에서 많이 느끼는 점이지만 아무리 프로세스가 없고 회사가, 나아가 산업 자체가 불안해도 회사 내에 내가 업무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꽤나 큰 믿을 만한 구석이 된다.

가장 불확실성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지고, 누군가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바라봐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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