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살아가는 대기업 이후 스타트업의 이야기 - 4
지난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새벽이 지나면서 이번 겨울 처음 맞이하는 큰 눈이 되었다. 창문을 꽤 세차게 때리는 비 덕분에 몇 번쯤 잠에서 깨었고 우연히 비가 눈으로 바뀌는 과정을 틈틈이 볼 수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작아지고, 하얗게 변한 빗방울은 빠르게 내리는 진눈깨비가 되었고, 아침이 되자 꽤 굵은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정말 흔히 '설경'이라 하면 머릿속에 그리는 함박눈이었다. 2020년이 시작된지도 벌써 거의 50일이 지났지만 은근히 이 눈이 올해의 좋은 일들을 가져오기를 자연히 바라게 되는 풍경이었다. 이럴 땐 눈 사진이라도 하나 올려야 하는데.
이번 주. 회사에서는 지난 1~2월 동안 진행하던 캠페인들이 얼추 마무리가 되면서 새로운 캠페인들의 진행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전형적인 업무를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은 이 업의 가장 큰 스트레스이면서 즐거움이다.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의사 결정으로 돈을 쓰는 사람도, 돈을 받는 사람도, 일을 하는 사람도 왜 하는지 알 수 없는 캠페인을 하고 있을 때는 큰 무기력함을 느끼지만, 캠페인의 규모와 상관없이 캠페인 관계자 모두가 즐거운 캠페인을 하고 나면 또 그 한 건으로 당분간은 회사를 나름 즐겁게 다닐 수 있는 활력이 된다. 운이 좋게도 새로 진행을 기다리고 있는 캠페인들은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종류의 것이라 진행만 결정된다면 또 즐겁게 임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이야기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서도 더욱! 회바회 (회사 by 회사)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다루고 싶은 이유는,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특징도 있겠지만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문화, 프로세스, 성숙도에서도 어느 정도 기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대기업에서는 목소리를 내면 손해지만, 스타트업에서는 보통(?) 목소리를 내면 이득이다.
'자기 PR도 능력인 시대다.'
라는 말을 들으면서 산지 꽤 된 것 같다. 이제는 당연한 소리로 여겨지는 말이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과유불급이라고 이 역시 지나치면 오히려 실제 가진 것에 비해 좋지 못한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영리한 PR은 항상 자신이 가진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상대방이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여기서 다루고 싶은 '목소리'란 자신의 합당한 의견, 생각, 주장이 아닌 어느 정도의 '생색'이다.
'생색'이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다분히 포함하지만, 좋게 보면 자기가 한 것을 남들이 알게 하는 일종의 PR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생색'도 영리하게 할수록 이득이다. 점심시간에 매일같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이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 조직에서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라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 "는 사람에게 다들 말로는 "아 그랬어요? 힘들었겠네요..!" 라고 하면서 실제로 그리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고, 반대로 업무로 골치아파하는 동료에게 "아 나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이런 게 어려워서 이렇게 정리를 했었다."라며 은근히 자료를 건네는 것이 영리한 PR의 한 방법일 수 있다.
라고 대기업에 다닐 때는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게 옳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꼭 '생색'을 해야한다면.)
좋은 상사를 만나서였던 건지, 대기업에서 내가 야근을 하고 다른 직원에 비해서 정성을 들인 일들은 늦든 빠르든 사수는 물론이고 팀의 과장님, 팀장님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미숙한 일들은 바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고, 잘한 일들은 바로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내 업무에 대한 피드백이 즉각적이고 분명하다 보니 더욱 일에 대한 책임감이 생길 뿐 아니라, 상사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신입사원으로서 내 일만 잘하면 난 그에 맞는 합당한 평가를 분명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물론 이와 동시에 '일이 일을 만든다.'라는 회사원 모두의 격언을 공감할 수 있다. 일은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는다. 더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
스타트업에서는, 내가 말하지 않고 표 내지 않으면 다른 회사 사람들이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잘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평균적인 시장 기대치 이상의 일을 해내도 내가 말하지 않으면 같은 팀 직속 상사조차도 알기 어려우며, 비상식적인 거래처 때문에 엄청난 벽에 막혀 있어도 그 업무를 직접 담당하지 않는 사람은 효율적인 지도를 해주기 어렵다. 짧은 경력으로 감히 추측하건데, 스타트업이 그렇게 된 데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다.
1) 상사는 '경력이 보다 많은 선배'일뿐, '상하관계'가 아니다. 딱딱한 대기업 문화는 일단 거절하고 보는 스타트업 성격상, 스타트업의 상사는 나보다 조금 더 큰 범주의 다른 일을 하는 선배일 뿐, 내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
2)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면서도 공동의 성과를 우선시한다. 스타트업에서 개인의 가치관, 성향은 매우 존중되며 그에 따라 타인보다는 자신의 워라밸, 가치관 개발 등에 집중하는 성향이 비교적 짙다. 회사와 개인의 동반 성장도 중요시하지만 그 이상으로 회사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기적인 업무 성과나 방식으로 개인을 평가하는데 매우 조심하며, 한 팀의 성과 크게는 그 회사 전체의 성과를 다 같이 보상 혹은 감수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묵묵히 일하는 사람보다는 힘든 것은 힘들다고, 잘한 것은 나 잘했다고 조금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회사에서 눈에 띄게 되고 보다 케어를 받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목소리'를 극히 안냄으로써 유연한 회사 문화를 요령껏 사용하여 일명 '루팡'짓도 쉽게 가능하다.
문화자체로 보았을 때 어떤 것이 더 좋은 문화인지는 알 수 없다. 대기업과 같은 문화에서는 그 문화가 잘 정착됐을 때의 좋은 고점과, 악용됐을 때의 안 좋은 저점의 진폭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스타트업과 같은 문화에서는 그 문화를 백분 활용하면 그 좋은 고점은 한계가 없겠지만, 그 반면 그 문화가 악용되었을 때는 그 부정적인 저점 또한 끝을 모를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여 사람을 많은 방면에서 기계가 대체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중요하지 않나 싶다. 똑같은 것을 하더라도 '누가'하고 '누구와'하는 가에 따라 매우 결과가 다양한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