ㅌㅅ후 제주도의 한달 #3

3일차 - 숙취와 비오는 제주도

by 꿀잠

아침에 눈을 떠 제일 먼저 숙취를 맞이했다.

예견됐던 숙취였지만, 역시나 숙취는 항상 예상을 초월한다.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이 들 때쯤, 문득 추적추적하는 빗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숙취와 비는 겹쳤고 집 안에서 한 참을 비오는 제주도를 바라보았다. 구름한 점 없는 하늘과 따뜻한 햇빛이 일품인 제주도에서 못 나가고 있는 날에 비가 오는 것이 행운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오는 날만의 매력이 없을리는 없어서 안도감과 아쉬움이 묘하게 겹쳐왔다.

그럼에도 하루정도는 이렇게 집 안에서 책을 읽으며 빗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김연수 작가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때는 무엇 때문인지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등의 일본 특유의 감성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김금희, 은희경 등의 한국 문학을 좋아했다. 스토리나 아이디어 등에서 탁월한 느낌은 아니지만 번역에서 느낄 수 없는 순수 한글 글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좋은 것 같다.


한창 읽고 있는데, 퇴사한 (전)회사의 단톡방이 불티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의 퇴사(의원면직)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인사명령이 뜬 것이다. 3월 3일부 최인우 사원 의원면직. 별 것 아니면서도 몇가지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나는 2월 15일까지만 출근하고 20일부터 제주도에서 놀고 있는데 3월 3일까지나 일한 것으로 쳐 준다니 감사하면서도, 이제 정말로 나는 혼자구나 하는 생각. 고작 1년 1개월, 물론 수많은 사람이 피식할 기간이지만 그 때는 어느 때보다도 제일 시간과 노력을 많이 쏟았던 곳. 언젠가 한국인의 가장 큰 특성은 어느 그룹이든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열망이 크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던 나로서는 이제 온전히 어느 곳에도 소속하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이다.


한라토닉의 힘인지 이상하게도 숙취는 책을 읽는 와중에도 점점 심해져 갔다. 결국 나는 오늘은 나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뒤로 하고 '알유**'을 찾으러 나갔다. 약국을 찾아 다시 함덕 해변까지 나갔지만 (숙소에서 3km), 충격적이게도 함덕의 4대 약국에서는 '알유**'을 취급하고 있지 않았다. 이 쪽에는 그걸 찾을만큼 만취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두통을 대신 할 타이레놀을 사들고 나오면서 매일같이 저 약을 사먹던 과거를 반성하게 됐다.


기껏 나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아쉽기도 하고, 비도 많이 그쳐 가는 것 같아 집 근처에 있는 북촌항구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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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간격으로 찍은 같은 곳의 사진인데도 묘하게 다른 색을 가진 북촌 항구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고싶었지만, 비가 그친 직후의 한적한 항구도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항구에는 이따금씩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짠내가 하나도 안나는 바다 바람 냄새는 타이레놀보다도 탁월한 숙취해소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집에 들어와 약간은 이른 저녁을 지어먹고, 오늘의 아쉬움을 달랠 빡빡한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마무리 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 어떤 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놓을 줄 알아야 놓은 손에 다른 것을 잡듯이, 나는 더 나에게 맞는 곳에 소속되지 위해 잠시 벗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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