ㅌㅅ후 제주도의 한 달 #14

16~18일 차 - 한라산이 내게 남긴 것

by 꿀잠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은근히 무시했던 한라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등산 많이 해보지도 않은 내가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을 무시했었다니.. 더불어 한라산 등반을 계획 중이라면 꼭! 사전 운동으로 기초체력을 기르고 도전하시길 바란다. 혹은 입산 가능시간에 시작해서 아주 여유롭게 등산을 하셔도 좋겠다.


먼저 한라산에 대한 기초정보는 다음과 같다.

1. 탐방 코스: 총 6코스가 있는데, 그중 관음사, 성판악 이 두 코스로만 백록담까지 갈 수 있다. 그중 성판악이 더 길지만 비교적 난이도가 쉬워서 성판악 코스를 많이 애용한다. 혹은 올라갈 때는 성판악, 내려갈 때는 관음사 코스를 애용하는 등산객들도 많다. 나는 차를 가져갔기 때문에 등하산 모두 성판악으로 왕복했다.


*성판악 코스(왕복 약 20KM): 성판악휴게소 -> 속밭 휴게소(4KM) -> 사라오름 입구(2KM) -> 진달래밭 대피소(1.5KM) -> 백록담(1.5KM)


2. 탐방 시간: 아침 7시 -> 오후 3시 (8시간 소요)


* 동절기 기준 성판악 휴게소에서는 아침 5시 30분부터 입산이 가능하다. 그리고 진달래 대피소까지 오후 12시 30분까지는 도착을 해야 백록담까지 등반을 시작할 수 있다. 12시 30분이 넘으면 통제해서 백록담은 먼발치에서 구경만 해야 하니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백록담 정상에서는 오후 2시에는 무조건 하산을 시작해야 한다. 왜 그렇게 빨리 통제하나 했는데, 이후 하산하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3. 탐방 팁:

3-1) 약 3월 말, 늦으면 4월 초까지는 아이젠과 폴대가 필요하다. 폴대는 필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진달래밭 대피소(해발 1,500M)부터 백록담까지는 아직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낮에는 강한 햇살에 녹았다가 밤에 다시 얼어서 매우 미끄러운 상태이다. 우리는 둘 다 가져가지 않아서, 내려올 때 아주 거의 앉아서 미끄러지면서 내려왔다.


* 등산용품은 제주도 여행에 가지고 다니기엔 매우 무겁고 부피가 크다. 그래서 공항 근처에 '오쉐어'라는 등산용품 대여 업체가 있는데, 등산화 (24시간/7,000원), 등산장갑(24시간/3,000원) 등 매우 물품이 다양하고 꽤 저렴하다. 위치가 너무 먼 경우 '짐 다오'라는 배송업체까지 있는데, 가격은 알아보지 않았지만 1~2만 원어치 대여하는데 배송비까지 쓰기 좀 그래서 굳이 이용하지 않았다.


3-2) 처음 휴게소인 속밭까지는 산책로 같다. 4km나 되지만 1시간 30분 정도면 주파 가능해서 아주 방심하기 쉽지만, 체력 안배에 신경 써야 한다.


3-3) 올라갈 때 못지않게 내려올 때 또한 힘들다. 한라산은 잘 정돈된 길보다는 돌밭이 많기 때문에 자연 지압 효과가 엄청나다. 내려올 때면 발바닥, 종아리, 발가락 안 아픈 하체가 없다. (물론 나만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올라갈 때 3시간 반, 내려올 때 4시간으로 오히려 내려올 때가 더 오래 걸렸다.


3-4) 물은 정말 소중하다. 옛날 어릴 적 기억으로는 정상 근처에서 컵라면을 팔던 곳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속밭, 진달래 대피소에 화장실만 있을 뿐 한 번 등산을 시작하면 어떤 구호도 받을 수 없다. 꼴랑 삼다수 2병만 가지고 올라 간 우리는 내려올 적에는 진지하게 물 좀 구걸할까 고민했었다. 물은 많을수록 좋다.




대망의 금요일(8일), 전날 아주 일찍 취침한 덕분에 5시에 개운하게 일어났다.

이래저래 준비한 뒤 집을 나섰는데, 운전을 30분쯤 하다가 문득 카메라를 안 챙긴 것을 알아챘다. 집 앞 슈퍼 갈 때도 폼으로라도 들고 다니던 카메라였는데 제일 중요한 날 집에 모셔둔 것이다. 출발이 매우 싸했지만, 들고 왔으면 무거웠을 거야 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어느덧 해가 뜬 7시, 성판악 휴게소에서 오늘의 동반자인 대학 동기 '두레기'를 만났다. 둘 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공복이라서 먼저 가락국수를 한 그릇씩 했다.

KakaoTalk_20190309_191219187.jpg 딱 봐도 생생 우동에 김가루 좀 더 넣은 것 같은 이 우동이 무려 5,000원!

내 기준에는 큰 맘먹고 상당히 이른 시간에 온 것이었는데, 벌써 주차장은 만차였다. 아무래도 이 시간대가 제일 많이 입산하는 시간이었나 보다. 그렇게 많은 인파들과 함께 등산을 시작했다. 처음 목적지는 약 4.1km 떨어진 속밭 휴게소라는 곳이다. 여기까지는 C코스, 즉 제일 쉬운 코스로, 일반 걸음 기준 1시간 30분 만에 주파 가능하다. 아침 햇빛은 한낮의 햇빛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한낮의 햇빛은 상당히 졸리면서 포근한 느낌이라면 아침의 햇빛은 훨씬 파란 느낌? 훨씬 기운을 북돋아 주는 느낌이라 어쩌면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KakaoTalk_20190309_191216417.jpg 아직은 아침 햇빛이 가득한 시간의 속밭 휴게소.

사실 여기까지도 나는 한라산이래도 그냥 오래 걷는 정도로 생각했다. 걷는 건 좋아하니까 그냥 계속 걷다 보면 올라갔다가 내려오겠지라고. 이 이후부터 B코스로, 사라오름 입구를 거쳐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약 3.5KM가 이어진다. 사라오름 입구에서는 길이 갈라지는데, 사라오름 정상으로 갈 수 도 있고 진달래밭 대피소로 바로 갈 수 도 있다. 사라오름은 오후 4시까지만 가면 하산이 가능해서, 조금 늦게 입산한 사람들은 백록담 대신 택하는 코스인 것 같다. 속밭 휴게소 이후부터는 경사가 꽤 가파르고, 등산로도 잘 정돈된 것이 아니라 꽤 울퉁불퉁한 바위길이 이어진다. 이제 조금씩 잊고 있던 등산의 고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래도 C코스였던 초반부는 주위의 꽤 키가 있는 나무들 때문에 주위를 살피기 힘들었는데, B코스에서는 드문드문 뒤를 돌아보면 꽤 시원한 전경이 펼쳐진다. 약 1,300M대의 높이 때문인지 주위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먼 바다까지 내려다보고 있으면 산 바람에 땀이 식는 기분이 꽤나 좋다. 그렇게 등산의 밀당을 조금씩 느낄 때쯤이면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한다.

KakaoTalk_20190309_125916963_17.jpg 진달래 대피소에서 바라본 백록담. 아직도 아득히 멀리 있는 듯하다.

이쯤 오면 이제 상당히 지친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 나도 힘든 와중에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묘하게 힘이 난다. 원래 더 푹 쉬려고 했었는데, 옹기종기 모여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경쟁심이 들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서부터는 A코스, 길이는 2KM인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얼음길이 즐비해서 아이젠이 꼭 필요하다. 없다고 물론 못 가는 건 아니지만 한 걸음 한 걸음에 스릴이 엄청나다. 그럼에도 이 코스가 단연 한라산 등산의 백미다. 약 500M만 더 가면 매 순간순간이 감탄을 자아낸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등산한 이 날이 날씨가 매우 탁월했던 것 같다. 미세먼지는 좋음으로 더없이 맑았고, 날씨 자체도 평온해서 정상에서도 바람이 거의 안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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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저 하얀 줄기 같은 구름이 백록담의 웅장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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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부근의 까마귀와 '두레기'. 여기만 보면 아직 한겨울이다.

백록담에는 유난히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저렇게 가까이 가도 꼼짝도 안 하길래 무슨 배짱인가 했더니, 백록담에서 김밥이며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이 계속 음식을 던져줘서 사람을 안 무서워하게 된 것 같다.

눈 앞에 펼쳐진 백록담은 물 한 방울 없이, 안개 조금도 없이 아주 선명하게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랐고, 바로 위에 펼쳐진 묘한 구름들과 어울려져 신기한 기운을 내고 있었다. 멍하게 바라보다가 사진도 못 찍고 내려와 버렸다.

우리도 여기서 사진을 찍고 싸온 김밥을 먹으며 꽤 오래 쉬었다. 생각보다 올라오는데 시간이 얼마 안 걸렸고, 하산은 오래 걸려봐야 2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누누이 말했지만, 하산이 등산보다 힘들었다. '두레기'와 나는 하도 미끄러져서 주위 등산객들이 모두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응원을 해줬다. 옆으로 걸어라, 나무를 잡아라 등 수많은 팁을 전수받았지만, 그냥 포기하고 기어 앉아서 미끄러지면서 내려가야 하는 코스들이 많았다.

내려가는 길에 정상 부근이었는데, 완전 군장을 메고 위장까지 하고 등산하는 UDT 특수대원들을 만났다. 정말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숨이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이 헉헉 하면서 올라가는 대원이 안쓰러웠다. 나는 저걸 메고 평지를 걷는 것만 해도 그렇게 죽고 싶었는데, 한라산 등산이라니... 특수대원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느덧 햇빛이 포근하게 바뀐 오후 3시, 우리는 이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이끌고 드디어 성판악 휴게소로 돌아왔다. 하루에도 몇백 명씩은 하는 한라산 등반이지만, 근래 한 것 중에 제일 보람찬 일이 아니었나 싶다. 혼자였다면 중도 포기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문득 같이 등반한 '두레기'가 고마워졌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등산한 것 같지만 또 언제 다시 이렇게 같이 한라산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KakaoTalk_20190310_124517155.jpg 두레기가 찍어준 역광 사진. 하늘이 매우 가까워 보인다.


성취감과 근육통을 안겨준 한라산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완벽한 하루를 위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먼저 공항 근처에 들려 대여했던 등산화와 등산장갑을 반납하고, '두레기'의 여자 친구가 일하고 있는 서귀포시로 향했다. 둘의 연애 초기부터 가끔 만나서 어울렸기 때문에 나하고도 꽤나 친한 사이라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여자 친구분의 퇴근시간이 아직 1시간 정도 남았었기 때문에 우린 근처 호텔의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감사하게도 직원분이 지역 주민 할인 혜택을 주셔서 뜻하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약 30분의 짧은 사우나였지만 다리는 아직도 후들거려도 기분만은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두레기'의 여자 친구를 만나 또 밤늦게까지 신나게 술을 먹고 마셨다.

KakaoTalk_20190308_221056379.jpg 하루의 시작과 끝. 한라산.

서귀포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대리 값이 게스트하우스 숙박비보다 비쌀 것 같아 그냥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묵었다. 한라산을 등반하고, 사우나를 하고, 맛있는 음식에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한 잔. 오랜만에 가져보는 꽉 찬 하루였다.




그렇게 제주도의 한 달 살이도 절반을 지나, 이제 3분의 2 지점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한라산을 다녀오자마자 제주도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제주도에서 맞는 6번째 비. 어차피 근육통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데 집에서 가만히 빗소리를 들었다. '쇼코의 미소' 이후 집어 든 책은 '두근두근 내 인생'으로 꽤 유명한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다. 지인으로부터 아주 먹먹해지는 책이라고 이미 말은 들었지만, 알고 읽어도 계속 내 안으로 깊게 들어가는 그 느낌은 점점 강해졌다. 좋은 책임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이번에 가져온 책들은 밝은 내용이 하나도 없는지.

제주도에는 호우 경보가 내렸고, 비는 내일 오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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