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 26일 차 -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제주도 살이의 끝물이 보일 무렵. 마지막 손님들이 찾아왔다.
하루에 입 밖으로 10마디도 안 하던 지난 며칠이었지만, 사실 그간 손님들이 너무 많이 와서 이 한 달 동안 혼자 왔다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하다. 그렇지만! 나(와 제주도)를 보겠다고 오는 손님들이니 성심성의껏 맞이하기로 했다. 사실 조금씩 심심해져서 서울이 스멀스멀 그리워지고 있기도 했다.
방문하는 손님들은 3명. 동기 한 명, 선배(지만 동갑) 한 명, 또 다른 선배(지만 퇴사 선배) 한 명의 희한한 조합이다. 지난 짧다면 짧은 1년의 회사 생활에도 이렇게 제주도까지 방문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손님들은 퇴근하고 밤늦게 제주도로 오기 때문에 미리 마트에 들려 장을 봤다. 연착으로 인해 모두를 만난 건 밤 11시가 다 된 야심한 시각이었다.
나의 조그만 안식처에 3명을 모두 재울 수는 없어서, 근처 월정리에 '월정 소랑'이라는 숙소를 잡았다. 숙소는 물론 기타 게스트하우스보다 훨씬 비쌌지만 정말 깔끔한 독채에 마당까지 있었다. 나도 1달 남의 집을 빌려 살고 있지만 왠지 우리 집과 비교돼서 기가 죽었다.
숙소에 도착해 대충 짐을 풀었을 뿐인데, 벌써 12시였다. 그렇지만 금요일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기 때문에 곧바로 장 봐온 것을 풀고 술을 마셨다. 같은 회사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인지 이야깃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퇴사자 둘 과 현직자 둘의 이야기는 그렇게 새벽 5시까지 이어졌다.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 10시쯤이었다. 짧은 2박 3일 일정에 잠은 사치였기 때문에 피곤한 몸을 일으켜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간 곳은 '사려니 숲길'. 오며 가며 자주 본 곳이었지만 무언가 웅장한 나무들에 움츠러들어 혼자 가긴 무서워 망설이던 곳이었다.
사려니 숲길은 최소한의 트래킹 코스만 안내하고 있어서 정해진 길과 영역이 있다기보다는 방문객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일행과 오손도손 이야기하면서 걷는 것도 좋지만, 혼자 와서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쉬고, 또 걷고 하면서 오래 있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점심을 먹으러 성산에 있는 '소다 공'에 재방문했다. 사실 그렇게 맛있을 것 같진 않지만 한번 머리에 꽂혀버린 옥돔 파스타를 꼭 먹어보고 말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렇지만, 인연이 아니었는 듯, 1시 넘어서 방문한 '소다 공'은 1시간이 넘는 웨이팅이 있었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우리 4 사람의 1시간을 투자하기엔 조금 그래서 일단 후퇴를 결정했다.
대신 성산 쪽에서 고기국수 맛집으로 유명한 '산도롱 맨도롱'을 방문했다. 이 곳 또한 웨이팅이 많았는데, 회전이 그래도 좀 빠른 것 같아 기다려보기로 했다. 사실 자리가 나서 들어갈 때는 2시가 다돼서, '소다 공'에서 기다렸어도 똑같았을 시간이었다.
사실 제주도의 여러 블로그 맛집을 가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유명한 맛집이나 그냥 길거리 지나가다 들린 식당이나 같은 메뉴면 맛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은 듯하다. 물론 약간 플라세보 효과처럼 조금 더 맛있는 듯한 기분도 들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면 1시간씩 기다리면서 막 시간에 쫓기듯 맛집을 들릴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다음으로 성산까지 오고 말았으니, 아주 흔하디 흔한 제주 관광지인 '성산일출봉'에 방문했다.
나름 제주도 오면 필수 방문 관광지인데 이제야 들리게 됐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기존에 방문해 본 기억이 비교적 선명해서였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좋아서였는지, 올라가는 곳곳이 기존에 생각했던 '성산일출봉'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이미 지겹게 본 바다고 하늘이고 돌인데도 불구하고 한라산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달까. 내려오는 길에 시원하게 달리는 보트를 타볼까 했는데, 다음 목적지인 '우도'에 가야 했기 때문에 성산일출봉의 정산만 찍고 서둘러 내려왔다.
내려와서 한라 봉과 천혜향 주스로 잠시 목을 축이고(그냥 미닛메이드 오렌지 주스 맛이다.), 서둘러 오늘 마지막 관광 목적지인 '우도'로 향했다. 충격적인 소식이지만, '우도'에서 제주로 나오는 마지막 배는 오후 5:30분에 있다. 오후 4:30분에야 성산 여객터미널에 도착한 우리는 입항을 거절당했고, 터덜터덜 터미널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약간 하루의 진짜 시작은 저녁 6시였던 서울 라이프에 찌든 우리들은 아직 해가 중천인 오후 4~5시에 하루의 끝을 준비하는 제주 라이프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숙소가 있는 월정리로 향했다.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해서 월정리를 자세히 못 본 탓에 노을이 서서히 지는 월정리에서 초저녁을 보내고 근처 횟집으로 이동해 오늘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MOUMOON 카페 옆에 있는 분식집에서 생맥주를 테이크 아웃해서 마실 수 있다. 거품 비율을 아주 환상적으로 따라주시는데, 테이크 아웃 컵에 빨대를 꽂은 생맥주 한 잔들고 해변을 거닐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횟집을 찾겠다고 근처 해변을 꽤나 걸어 다녔는데, 해지는 시간대라서 그런지 찾아 헤맸다기보다는 올레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월정리' 해변 근처에는 카페가 엄청나게 많은 반면, 횟집은 찾기가 힘들다. 있어도 곁들이찬이 많고 근처 가게 주인들마저도 차라리 마트에서 포장해서 먹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성비가 안 좋은 곳이 많다.
그렇게 우리가 찾아간 곳은 차를 조금 타고 가야 하는 김녕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곰막'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추후 제주도에 오면 다시 꼭 방문할 예정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횟집에서 회를 먹으면 회 자체보다는 이런저런 곁다리가 많고 그것 때문인지 너무 비싸서 불만이었는데, 여기는 그런 곁다리 전혀 없이 회만을 판매하고 있다. 거기에 식당 바로 옆의 대형 수족관(정말 작은 수산시장 급의 거대 수족관)이 있는데 그곳에서 직접 바로바로 회를 떠주셔서 그런지 매우 싱싱하다.
4명이서 회로만 배를 채우고, 성게 국수까지 먹었는데 8만 원? 대로 나왔던 것 같다. 제주도 횟집에서 먹으면 최소 15만 원대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우도 땅콩 막걸리는 개인적으로는.. 한 병 먹는 것은 괜찮지만 맛이 좀 강해서 많이 먹기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이후 마신 것이지만 막걸리는 제주도 유산균 막걸리를 추천한다. 아직 서울에는 없는 것 같은 눈치다.
그렇게 '곰막'의 마지막 손님으로 문을 닫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빡빡했던 일정에 피곤할 만도 했지만, 횟집에서 마신 술 때문인지 오늘도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오늘도 어제 마시고 남은 한라 토닉을 안주 삼아 새벽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이 험난한 여정의 마무리는 '한라산'이었다. 이미 저번 주에 다녀온 나는 도저히 다시 올라갈 엄두를 못 냈고, 남은 3명 중 2명이 '한라산'을 꼭 등반하고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 아침 일찍 성판악까지 같이 가기로 했다. 지난 2일간 너무 계속된 음주생활에 조금 말려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 힘들게 다녀오고 나면 그 성취감과 상쾌함도 알기 때문에 성판악까지만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한라산을 등반하는 동안 '월정 소랑'을 체크아웃하고, 월요일 연차를 쓰지 못해 오늘 돌아가야 하는 다른 한 명을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한라산을 등반할 때는 그렇게 하루 종일 등산하는 느낌이었는데, 공항 갔다가 다시 오랜만에 우리 집에 돌아오고 얼마 있지 않아 한라산 등반 일행이 하산했다는 연락이 왔다. 역시나 나때처럼 기진맥진한 그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무언가 놀릴 거리가 생긴 느낌이었달까.
둘은 월요일 연차를 쓰고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함덕 해변으로 가서 오늘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함덕 하면 역시나 '델문도' 카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서울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입장에서 의도치 않게 제주도 생활의 처음과 끝이 '델문도'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제주도에서 기억에 남는 카페라고 하면 관광으로는 '델문도', 편안한 휴식으로는 '바람벽에 흰 당나귀'라고 할 것 같다.
그렇게 약간의 휴식 뒤 흑돼지로 기력을 충전하고 밤바다가 보이는 포차에서 여행을 마무리했다. 하루하루 여유롭게 보내던 그간의 제주도 생활에 비해 정말 쉴 틈 없이 놀고 마신 지난 3일이었다.
18일(월요일) 이른 아침, 남은 두 분을 공항에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 아침 비행기라 공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침 떠오르던 해를 만났는데, 넓은 6차선 도로에 차도 몇 대 없이 바로 앞에서 강렬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자니 뭔가 남들은 못 겪어본 경험을 혼자 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지만, 조금 더 이런 순간을 많이 봤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이렇게 들어가면 지난 며칠간의 피로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쉬고, 그러고 나면 이제 제주도는 정말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밖에 남지 않는다.
다음 글은 제주가 아닌 서울에서 쓰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