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후 일주일 혹은 퇴사 후 한 달 - 결국 달라진 건.
제주도에서 돌아온 지 벌써 6일이 지났다.
회사의 동료들이 서울로 가고 나서 남은 이틀도 정신없이 지나갔다. 월요일 저녁에는 시골집이 제주도인 대학 동기가 내려와서 고사리 해장국에 제주 유산균 막걸리를 마셨다. '몸국', '각재기국', '고사리 해장국' 등 아직도 이렇게 생소한 제주도 토속음식이 많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겨우 1달 산 것 가지고 제주도 좀 아는 척하려던 것이 민망해졌다. 정말 토속 제주 음식을 먹어보자는 각오로 '각재기국' 맛집을 찾아갔지만, 공교롭게도 월요일부터 재료가 다 떨어져 이미 문을 닫으셔서, 고사리 해장국이 일품이라는 '우진 해장국'으로 갔다.
그렇게 제주도 생활의 마지막 날, 청소기와 물걸레를 싹 돌리고, 집 앞 편의점 주인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다려마을에 같이 사는 고양이 4마리들도 한번 둘러보고 이 집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짐들을 그대로 들고 집을 나섰다.
1 달이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난 1달이 머릿속에 그렸던 제주도 생활이냐고 하면 순순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저 퇴사라는 것에 신이 났던 나는 제주도를 혹은 1 달이라는 시간을 너무 가볍게 봤다. 아침에 맑은 햇살과 함께 알람 없이 벌떡 일어나고, 하루를 되돌아봤을 때 나름 이것저것 많이 했음에 뿌듯함을 느끼고, 하루의 마무리에 1~2시간 정도는 공을 들여서 글을 쓰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면 곧바로 꿀잠을 자고 하는 일상들이 이어지길 바랬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1 달이면 내 안에 어떤 것이 달라져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난 그 하루하루의 일상을 너무 가볍게 봤고, 여전히 내일이면 어때, 지금이 아니면 어때 하는 마음으로 그저 숨만 쉬어갈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주도에서 보낸 행복했던 시간들을 모두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분명 어떤 순간에 어떤 감상이 있었고, 그 순간에 지금 당장 어떤 의미를 붙이지 못하더라도 이미 나의 한 부분이 된 것은 확실하다.
제일 아쉬운 것은 역시나 스스로에게 들인 시간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는 것이다.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바다를 보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이 브런치를 켜 두고 조금씩 조금씩 채워나갔어야 했고, 그러길 바랬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점 그저 하루하루 있었던 일들을 기록해놔야 한다는 강박 비슷한 글들이 이어졌고, 나도 모르게 이 곳을 채우는데 들이는 3~4시간을 아깝게 혹은 귀찮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은 나의 큰 단점 중에 하나다. 제주도에 와서 하려고 했던 그 여러 가지 중에 하나만 제대로 했어도 충분히 보람찼을 텐데, 그저 가진 욕심만 커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려다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했다고 말할 수가 없어지곤 한다. 운동도 이것저것 할 줄은 알지만 꾸준히 한 건 없어서 어느 것 하나 잘하지 못하고, 악기도 그렇고, 제주도에서 한 손글씨도, 글쓰기도, 사진도, 코딩 공부도 그저 모두 발만 담근 상태로 1달이 끝나버린 것이다.
이렇게 또 서울에 와서 나는 가진 게 시간밖에 없다는 무기로 이것저것을 동시에 계획하고 있다. 부지런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허영심일 수도 있고, 이렇게 해야 들인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일 수도 있다.
최근 어떤 외국계 기업 디지털 인터뷰 질문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당신은 얼마나 야망이 크고 경쟁적인가요? 개인적인 야망과 직업적인 야망을 알려주세요." (영문 질문이라 번역이 좀 어색하다.)
같은 질문이라도 한국 회사에서 받았으면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정도의 질문이었을 텐데 야망이라는 단어가 탁 나와버리니 말문이 막혔다. 꿈이라면 무언가 착한 소망 같은 느낌인데 야망이라고 하니 조금 더 쌔고, 조금 더 도전적인 느낌이 들어서였다. 실 계속 '야망'이라고 하니 너무 거창하고 오글거리는데 마땅한 대체어를 찾지 못하겠다. 솔직히 야망이라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준비시간 동안 멍 때리다가 어영부영 답하고 말았다.
이후 '집사부일체'에 나온 박진영이 그런 말을 했다.
자신도 남들처럼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과 25세에 20억을 벌 자라는 꿈을 이루고 나니 너무 헛헛하더라. 그래서 최초로 미국에 K-POP을 진출시키는 꿈을 가졌는데, 이상하게도 외적 요인 때문에 그 꿈이 자꾸 안 이뤄지더랬다. 고민하던 박진영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뤄야 할 '꿈'을 가지는 대신, 가지고 살아야 할 '가치'를 추구하기로 했다. (I want to live 'for') 여기서 박진영이 말하는 '가치'가 위 면접에서 받았던 '야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든 일관되게 가지고 갈 '가치'.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야망'이지 않을까.
결국 올초 나름 인생에서 격동의 시기를 겪었음에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나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고민 자체를 잊기 위해서 제주도를 방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잠시 잊고 있던 고민들을 하나씩 꺼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