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정리하고 갑시다
1. 요점 정리
예술가로 살아내기 위해 첫 번째 단계는 이 일이 미칠 듯 좋아야 하고, 두 번째는 말도 안 되는 꿈도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세 번째는 나를 반영하는(혹은 위로가 필요한)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관찰하고, 네 번째는 넓은 관점(새의 눈으로)에서 내 위치를 확인해야 하고 다섯 번째로는 새로운 시간과 장소를 탐색해야(아이처럼) 한다는 것이었다. 휴.
이제 여섯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2. 정리하고 갑시다
대학원 시절, 수업이 끝나면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꽤 잘 나가는 아티스트였는데 항상 내 작업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네 작업은 소통하려는 의지가 없어."
모두가 내 작업을 좋아하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었는데, 그 말은 내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그 말은 결국 내 작업은 나의 배설물 정도로 그친다는 것인가. 아무도 볼 필요도 없는. 나조차도 남에게 보이기 꺼려야 하는 작업인가. "소통 안 하면 뭐 어때"라고 예술가처럼 거들먹거려야 하는데. 나는 그 친구의 말에 반 정도 동의했던 것 같다. 나 스스로도 조금 부끄럽기도 했을 거다. 다만 그 말이 악령처럼 나를 따라다녔다면 나는 작업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그 친구도 기억하지 못할 그 말은 내 기억 어딘가엔 분명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 말이 문득 오늘 기억이 났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은 하루 이틀일이 아닌데 오늘은 그 말이 뚜렷하게 (이미지로) 보였다.
그래서 그 말이 다시 저 심연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렇게 글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럽에 온 후 이사를 많이 다녔다. 짐이 많아지는 게 두려웠다. 많이 버려야 했고. 그래서 알게 된 것은 살아가는데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많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땐, 계절마다 늘 옷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내 집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다음 이사를 생각해야 한다. 그 이사를 생각하면 물건을 사기가 두려워진다. 삶이 그렇지 않을까.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있는 게 너무 많다면 떠나는 게 더 싫어질 것 같다.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그랬었다. 내 작업에서의 '변화'가 두려웠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내 작업에서 나는 너무나 보수적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속에서는 꿈틀대는 자유 의지가 자꾸 튀어나와 늘 언밸런스의 작업을 해왔었다.
머릿속에 많은 것들을 이고 지고 그림 안에 담으려 하니 소통은커녕 그리는 내가 더 피곤했던 것 같다.
나를 위해 생각과 물건, 그리고 인간관 계마 저도 되도록 간소하게 정리하고 이 삶을 걸어가야 한다.
나는 아직도 쓸데없는 물건에 눈이 가고, 사고 싶은 것도 많다. 때론 그냥 사 버리기도 하고 또 외로움에 친구를 사귀러 파티 같은데 많이 다녀야 하나 고민하기도 한다.
그런데 너무나 다행인 건 그 '허망함'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산 후의 허망함과 '파티'친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일찍 알아버렸다. 그런데도 작업은 소통을 닫고 있었다. 오직 솔직해져야만 하는 작업에서조차 나는 누군가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 예술가가 모이는 이유 중 하나는 '자유로움'이다. 그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들을 '기억해야 할 부끄러운 기념비'로서 당당하게 보여준다. 길바닥 곳곳에 유태인이 살았던 이 집에서 몇 명이 학살로 죽었고.. 등등의 정보가 적힌 말뚝을 볼 수 있다. 다시는 그런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이사란 그런 것이 아닐까. 부끄러운 짐이 아니라 '변화'를 지고 옮겨가는 것. 그렇게 자유로워지는 것.
그러니,
예술가로 살아가기 여섯 번째 단계는 정리하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박스를 여러 개 만들고 분류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다음 단계로 이사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내 안에서 꺼내고 싶은지 알게 된다. 쓸만한 게 없다면 다 버리고 '텅'비운채,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