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_살아내기

by Artist K

1. 어쩌다 여기까지


나의 대학 시절에는 발표나 토론을 하는 수업 시간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토론문화를 접했다. 사실 질문을 하고 또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논문 발표를 해야 했을 땐, 혼자 빈 강의실을 찾아다니면서 강단에 서는 연습을 해야 했다. 이런 내가 대학에서 강의도 했었다. 연습은 필요 없었지만 내 생각에 나의 첫 학기 강의는 많이 부족했다. 두 번째 학기부터 스스로도 열정을 느끼고 학생들과의 교감도 좋았다. 그런데 가르치면서 배우는 게 더 많았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학생들도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강의를 했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학생이자 선생님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하는 말에 학생들이 영향을 받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작업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교육은 '책임'이었다. 내가 나의 작업에 임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또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한국, 이 나라에서 예술가로 살아가기 힘든 이유 중에 하나가 교육에도 그 책임이 있지 않을까.


대학원을 졸업하고 또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기. 다른 교육환경을 체험해보기.

그래서 유럽에 있는 아카데미의 ph.D 프로그램에 지원했었는데 떨어졌고(당연히 될 거라 믿고 나는 미리 그곳에 가 있었다), 비자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와야 했었다. 다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돌아오기 전에 아트스트 레지던시에 지원했던 것이다.

http://www.transartists.org/

이 사이트에서 세계 여러 곳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의 오픈콜을 알려준다. Grant를 받을 수 있는 레지던시는 경쟁률이 치열하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신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작업에 대한 완성도 있는 글을 써야 하고, 그곳에서 하게 될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우선 네덜란드에 있는 레지던시를 뒤졌고, 여러 군데 지원을 했으나 한 곳에서만 연락이 왔다. 그리고 디렉터를 만나 짧은 인터뷰 후에 입주 약속을 받았다.


2. 이민국에서 생긴 일


나는 디렉터가 추천 편지를 써주면 연장 비자를 받을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내가 9월에 왔고 그때가 12월이었다. 유럽에 머문 지 거의 3개월이 다 되어가서 무지 초조했지만 아티스트 레지던시에만 들어가면 만사 해결될 거라 믿었다. 이민국에 편지를 들고 갔는데 당장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란다. 이민국 직원이 1시간을 내게 투자하면서 이 방법 저 방법 찾아주려 노력했으나 내가 너무 늦게 찾아간 실수도 인정해야 했다. 그때 갑자기 학위가 있냐고 물었다. 내가 최종 학위를 말해주자 직원이 세계 대학 순위를 검색했다. 그 학교가 순위 200위안에 들지 않으므로 학위가 있다 한 들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했다.

나는 이 학교가 그래도 한국에서 예술대학으로 유명한 곳이라 설명했으나. 어쩌겠나.


그때 느낀 건 한국에도 아카데미와 같은 예술전문학교가 필요하다! 는 것. 미국의 시카고 인스티튜트, 영국의 로열 아카데미. 독일의 여러 쿤스트 아카데미 등등. 세계에서 예술로 알려진 학교는 '대학(University)'이 아니라 예술전문학교이다. 그러나 그 명성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예술가로 살아가기에 자부심을 준다. 예술가에게 학교가 중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겪은 이민국 해프닝에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다. 한국에 재능 있는 예술가 지망생들과 훌륭한 교수진을 한데 모아놓고 대학 안에 '미술학과'로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닌, 따로 예술(미술) 전문학교를 세운다면! (현재 한국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관점에서는 예술 고등학교보다 예술 전문 아카데미가 더 필요하다. 만약 대학내의 미술학과 대신 전문성을 갖춘 아카데미가 한국에도 생긴다면, 물론 처음에 시행착오는 겪겠지만, 분명 세계적인 대열에 오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또한, 외국의 예술전문대학과 교환체제로 한국에서도 예술 전공의 학생들이 다양한 커리큘럼을 체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당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3개월 후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레지던스 입주 약속은 유효했으므로.


예술가로 살아내기 네 번째 단계는 세상을 좀 더 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우주의 관점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바라보기. 그러면 알게 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이 전부가 아니므로(지구본(혹은 구글 earth)에서 한국을 찾아보기를) 나는 더 용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 따라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넓은 관점'에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

좋은 작업은 어디서나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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