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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벙커에 살게 되었을까

by Artist K

나는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 곳에 왔다. 다들 공부하느라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또 더 낭비할 게 남아 유럽까지 왔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였다.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내가 박사학위까지 받은 이유는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순수 회화(전공) 쪽 논문은 대부분 미술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작품론이다. 나는 내 작업에 대해 객관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고(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논문을 쓰는 내내 정말 희열을 느꼈다. 매일 도서관에 출근하듯이 가서 자료를 찾고, 글로 정리하는 일을 1년 정도 했다. 공부의 모든 과정을 합하면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 돌아봐도 행복했던 시간이다. 대학원에 오기 전에 계속 사회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시간이 무지 좋았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배움을 위한 배움. 물론 교육시스템이 지니고 있는 '오래된' 모순 앞에서 허무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은 비할 데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나의 멘토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꾼 꿈도 잊을 수가 없다. 꿈에서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자리를 떠나 고개를 떨구고 거리를 걷는데 홍대 앞에 시민 행렬이 있었고 그 일행 중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낯선 여자였다. 그런데 내 손을 잡고 같이 밥 먹으러 가잔다. 그 손이, 그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따라가야겠다고 맘먹는데 꿈에서 깼다. 그리고 나의 멘토를 학교 그룹스터디에서 만나게 된다. 그녀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작업하는 내게 언제나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시를 나누는 사람이었고,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이 곳에 와있다. 나를 꿰뚫어 본 그녀가 떠날까 말까 망설이는 나를 등 떠밀어 주었다. 혹시 공항에서 도망칠까 봐 새벽부터 집 앞에 나를 데리러 와서 비행기 타는 것까지 봐주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졌지만 나는 우리가 웃으며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참, 장엄하게 작별했는데 3개월 있다 잠시 한국에 돌아갔었다. 내가 가려고 했던 학교에 장렬하게 불합격되는 바람에 비자연장을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니 이제 공부는 그만하고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경험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곳, 벙커에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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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예술 요새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정말 매력적인 곳인데. 마치 수용소 같기도 하고 감옥 같기도 한 이곳은 1880년부터 1914년까지 수도(암스테르담)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 요새로 지어졌다.

http://www.kunstfort.eu/fort/geschiedenis/fort-bij-vijfhuizen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아름답게'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벙커에 내가 살았던 것이다.

너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음. 전쟁체험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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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티스트 중에 이곳에 제일 오래 머문 사람이 나라는 소문도 있다.

여하튼 나는 적응해보기로 결심한 후, 하루는 레지던시에만 머물면서 주변 산책도 하고, 다른 날은 기차 타고 암스테르담에 가서 갤러리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옆 방 사람들과도 친해져서 자주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게 되었다.

바로 옆 집 룸넘버 8 아저씨는 내게 좀 부담스럽게 친절해서 일부러 거리를 두었는데. 룸넘버 7 청년은 예의도 바르고 눈빛이 아주 선해서 스스럼없이 친해졌다. 잘생긴 외모도 물론, 좋았다:)

이 조용하고 외딴 공간에 그래도 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참 위로가 되었던 시간이다. 처음에는 공용 부엌을 쓰는 것도 힘들어서 방에서 잘 나가지도 않았는데, 그런 내게 늘 먼저 다가와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도 차츰 마음을 열게 되었고, 함께 요리하고 와인 마시면서 이 곳 문화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참고로 지금은 이곳에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더이상 운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매력있는 전시공간으로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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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4.30 일기

멀리 떠나와 보니 내 안에 '아무렇지 않아' 지는 것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주근깨가 생기거나 말거나 해를 즐기기.

비에 젖거나 말거나 우산 없이 다니기. 바람이 하도 세서 우산보다는 모자 달린 옷이 편하다.

혼자 기차 여행하기.

말이 되던 말던 영어 지껄이기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