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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숫자로 남겨진 길 위에서

by Artist K

벙커에서 기록한 일기들을 찾아 글을 쓰던 도중 잠시 베를린에 왔다. 이번 방문은 내년 전시에 대한 미팅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에 내가 살았던 집의 주인과의 담판이었다. 나는 독일에서 월세를 내고 살았었는데 집주인이 내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화가 났던 것은 내가 그 집에 사는 동안 집주인이 나에게 물세가 많이 나왔다고 돈을 요구해서 두 번이나 비싼 월세와 함께 돈을 지불했었다는 것이다. 주변에 물어보니 베를린의 물세는 굉장히 저렴한 편이라서 물세를 따로 요구하는 일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영수증을 요구했었으나 집주인은 끝까지 영수증을 주지 않았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게다가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집이라 안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집주인이 나를 만나려하지 않고 계속 피하고 있어서 세입자 보호 단체로 찾아갔다. 화가 나서 경찰서로 직행하려다가 독일은 '법대로'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조언을 듣고 그 곳에서 인권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내게 정말 비슷한 사건으로 한국인이 찾아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사건이 일종의 '차별'이라고 얘기 했다. 이 일들을 헤쳐나가면서 외국에서 사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온몸 깊숙이 느낀다. 몇 번이나 나에게 나 스스로 욕을 했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후회들을 했는지 모른다. 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내가 똑바로 인지했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하나하나 따져봐야 했고 믿지 말았어야 했다. 오랜만에 깊은 상심이 찾아왔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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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다사다난했던 내 인생의 장소이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벙커는 베를린의 삶에 비하면 평화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아.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이 기록들이 지금 내가 하고 걱정의 크기를 줄여준다. 나는 참. 잘 견뎌왔구나. 저 시간을 잘 지나왔기에 지금도 잘 버틸 수 있음을. 나를 다시 믿게 된다. 2019.


IMG_2090.JPG 베를린의 길거리 낙서



2014년 6월, 드디어 큰 작업실에 입성하게 된다. 전시공간으로 쓰였던 곳인데 내가 잠시 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나는 공간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 편이라 넓은 작업공간을 선호한다. 작은 방에 있으면 작업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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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 공간을 사무실로 개조 중이다. (지금 이 공간 완전히 새로운 곳이 되었다. 2019)


이 레지던스에 처음 왔을 때 묘지 돌로 만든 길(stone grave path)이 참 인상적이었다. 네덜란드의 한 예술가가 사람들에게 묘지의 돌만 기증을 받아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잘 보존된 전쟁 요새에서 묘지의 돌들로 만든 길을 걷고 있으면 기분이 묘했다. 삶과 죽음이 입체적으로 다가왔다고 해야 할까. 어느 날부터 나는 그 돌들로부터 숫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프로타주'기법으로 이 세상에 처음 온 날짜와 떠난 날의 기록을 수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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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길을 내려다보듯이 내 짧은 생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가끔은 (부감법) 새의 눈(Bird eye's view)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행인 것은, 작업에 대해 구상할 때나 작업에 집중할 때 나는 자질구레한 세상사를 거의 잊게 된다. 그래서 우주의 시간을 생각할 수 있고, 내가 생의 어디쯤 걷고 있는지도 아주 가끔은 인식한다. 오늘처럼 비루한 일상에 시달리게 되면 나는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막막하고 먹먹하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여전히 헤매고 있는 나를 보면서 축축 쳐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아무도 그걸 대신해줄 수 없기에 나는 스스로 위로해주기로 했다. 종국에는 숫자로 남겨질 내 삶에서 지금의 일은 과정일 뿐이며 모든 것을 다 잘해낼 필요는 없다고.

나는 잘하는 것이 따로 있다.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나 자신에게 얘기해주었다. 나는 안다. 내가 잘한다고 믿는 것에서도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왔는지. 사실 어제도 작가를 위한 지원이 넉넉한 레지던스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제 그런 것쯤은 웃어넘긴다.

내가 잠시나마 새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그것에 나는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내가 수집한 삶과 죽음의 숫자들로 나는 보다 큰 작업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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