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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의 여정_굿바이 벙커

by Artist K

어디에 있던지, 그곳이 한국이던 유럽이던 내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참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에서는 '멋'있는 사람 되기. 언제나 사람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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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을 땐 비 오는 날이 좀 특별하게 느껴졌는데. 네덜란드에서는 햇빛 나는 날이 무지 특별하다. 여기서 비 오는 날은 그저 평범한, 홀랜드 날씨의 전형일뿐이다.

오늘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나는 네덜란드의 예술가가 묘비의 돌로 만든 길에서 숫자만을 모아 내가 지내고 있는 쿤스트 포트(Kunst Fort)의 모양을 표현했다. 바로 하늘 위에서 이곳을 내려다본 풍경이다. 일종의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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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2미터가 넘는 큰 작업이다. 하늘 위에서 인생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결국 숫자들로 남겨진 삶과 죽음을 매일 보면서 걷는 기분일 것이다. 숫자로 남겨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 걸어야 하는 삶.

그 장소, 내가 머물렀던 네덜란드 그 작은 나라에서, 도시 외곽에 자리한 레지던스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지었던 벙커에서 나는 걸었고, 생각했고, 작업했다. 내가 떠나 온 날 한국에서는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그래서 오래 슬펐고 힘들었지만, 다시 걸어야 했다.

나는 3개월을 이 곳에 머물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나름 좋은 작업을 했으며 시청에서 저 그림을 구입하는 행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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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은 전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나라에서 이렇게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내 곁에서 액자 만드느라 늘 고생하는 룸넘버 7 청년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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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전시에 대한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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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동안 작업했고 나중엔 전시도 하게 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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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중 설치.

저 손은 룸넘버 8 아저씨가 부엌 창문 앞에 놓아둔 것이었다. 아저씨는 창문밖에 과일이나 야채 등을 놓아두는데 지나가는 학생들이 훔쳐갈까 봐 '경고'의 의미로 저 손을 놓아두었다고 했다. 훔쳐가면 손을 자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재밌어서 작품으로 만들어보았다. 세상에 예술가들도 많고 그만큼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작가들도 많다. 남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 인양 마음대로 훔쳐가는 작가는 예술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예술가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과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은 매우 다르다. 그런 류의 인간들은 우선 안 멋있다. 그들은 그저 '도둑'일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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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가장 써보고 싶은 단어였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나라의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미지로 읽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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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틸라이프 시리즈의 첫 시작이다. 내가 이곳에 와서 이젠 익숙하지만 생소한 물건, 정물들과 벙커의 모습. 마치 기억과 같은 작업이다. 정지되어 있지만 기억 속에선 언제나 삶과 연결되어 살아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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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주요 인사 회의실에 걸린 내 작업.

아. 이렇게 돌아보니 내가 보람찬 3개월을 보낸 것 같다. 사실 저 때가 2014년 7월이고, 7월 말에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겼으므로 사실 이야기의 반도 시작하지 않은 것이다.


네덜란드의 벙커에서 3개월은 꿈과 같았다. 베를린에 비하면.

거미와 함께 벙커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내가 많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여전히 감사한 일들이 내게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진들을 보다 보니 행복하게 웃고 있어도 당시의 힘들었던 순간들 역시 내 기억엔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좋아서 떠나온 길에서 나는 마냥 좌절할 수 없었다. 내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게 나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빠르지 않게 천천히 걷고 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몰랐던 내게. 아니 몰랐다기보단 불투명한 꿈을 향해 달리다 피곤해져 버린 내게, 지금의 시간은 깨끗하다. 무엇보다 지난날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싶은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좋다.

이제 베를린 이야기를 할 차례가 다가온다.. 이번 크리스마스 휴일엔 루마니아에 가게 되었는데 가서도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년 전시일정도 빡빡한 와중에 긴 휴가 일정이다. 그래도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다. 여전히 설렐 수 있다는 것. 그 에너지가 나를 지치지 않게 해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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